[권용진의 의료와 사회] 탈모 치료 급여화 공론장을 확대하라
대통령 말 한마디에 건강보험 흔들려선 안돼
사회보장 신뢰 지키려면 충분한 공론 거쳐야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사회보장 신뢰 지키려면 충분한 공론 거쳐야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건강보험은 사회보장제도다. 능력에 따라 내고 필요에 따라 받는, 연대의 약속이다. 나의 위험을 나의 능력만큼 감당하는 제도가 아니라, 누군가는 보험료를 많이 내도 혜택을 받을 기회는 가입자 전체에 동일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무엇을 먼저 보장할지는 ‘의학적 필요’에 따라 정해야 하고, 그 우선순위는 정의롭게 정해져야 한다. 이 원칙에 따르면 탈모는 희소 질환이나 중증질환에 비해 의학적 필요가 낮다. 한발 물러서서 탈모인 누군가에게는 급여의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급여 결정을 위해서는 그 결정 과정이 보험료를 내는 국민이 납득할 만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 건강보험이 사회보험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 주도형이라는 데 있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위원장은 복지부 차관이고 안건도 복지부가 상정한다. 관료가 끌고 전문가가 거드는 이 거버넌스에서, ‘무엇이 정의로운 분배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이 정부에 달린 것이다.
의료 분배의 정의를 평생 연구한 노먼 대니얼스 미국 하버드대 인구및국제보건학과 교수는, 무엇이 정당한 분배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고 필요의 경중을 가릴 보편 공식도 없기 때문에, 오직 정의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서만 구현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그 절차의 운전대를 정부가 쥐고 있다.
2002년 설계된 이 거버넌스가 지금 시험대에 올랐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관료 판단이 뒤집히고 연 수천억원의 향방이 정해진다면, 그런 거버넌스로 건강보험을 지탱하기는 힘들다. 진짜 위기는 그다음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예측 기술이 발달할수록 위험은 더 개인화한다. 병들고 아픈 정도를 수치화할 수 있어서다. 결국 모르는 위험을 함께 나눈다는 연대의 토대가 빠르게 허물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시대일수록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신뢰’가 더욱 중요하다.
탈모 급여화가 대통령 지시로 관철된다면, 그것은 몇천억원의 보험료 집행 문제를 넘어 건강보험 자체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고, 무엇을 함께 책임질지 정하는 사회적 합의 거버넌스마저 약화할 것이다. 길은 하나다. 대통령도 정치세력도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제안은 통상의 안건보다 반드시 더 넓은 범위에서 더 오랜 공론을 거쳐야 한다. 또한 그 과정이 신뢰할 만해야 연대의 사회적 토대가 보존될 수 있다. 정당성은 권위가 아니라 절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해 필자의 연구진이 우리 국민 1000명에게 물었더니, 희소 질환 보장을 늘리기 위해 감기 같은 경증질환 보장을 줄이는 데 52.7%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보통이다’까지 더하면 80%를 웃돈다. 국민은 이미 필요의 원리로 사고하고 있다. 그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의견을 들어야 한다. 당신의 보험료를 더 내서라도 탈모 급여화에 찬성하겠는가. 그 답을 듣기 전에는 누구도 이것을 국민이 원하는 정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