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어 좌파'를 아시나요…아무도 말하지 않는 유럽 사회의 비밀 [홍승표의 유러피안 아비투스]
'왕관'은 사라졌지만 귀족은 남았다
유럽의 '지적' 부르주아지
유럽의 '지적' 부르주아지
한때 사람을 구분한 것은 귀족의 작위와 토지였다. 오늘날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학위, 언어, 문화적 세련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태도다. 미감이라고도 하고, 취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상속이 법적으로 보이는 재산의 문제였다면, 오늘날의 상속은 훨씬 은밀하다. 좋은 학교에 갈 수 있는 환경,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언어 습관, 박물관과 콘서트홀을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감각, 공적인 자리에서 과장되지 않게 말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 이런 것들은 이력서에 찍히지 않지만, 사람의 위치를 결정하는 데 오히려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신분제가 아니다. 누구든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상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 사회는 늘 자신을 그렇게 설명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문화적 선별 과정이고, 그 학교 안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능력은 또 다른 배경 자산에 의해 좌우된다. 입학은 열려 있어 보여도 소속감은 그렇지 않다. 문은 열려 있어도, 그 방 안의 공기를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법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현대 유럽의 상층은 과거 귀족제와 닮았다. 차이는 작위가 사라졌다는 것뿐이다. 혈통의 직접성이 줄어든 자리에 교육의 세습, 감각의 세습, 네트워크의 세습이 들어왔다. 부모 세대의 경제자본은 자녀 세대의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으로 전환되고, 그 자본은 다시 명문 교육과 직업적 지위로 재생산된다. 사회는 겉으로는 “누가 더 가치 있는가”를 묻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누가 이미 이 세계의 언어를 알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셈이다.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는 일종의 ‘유리천장’이다. 다만 여기서의 유리천장은 단순히 제도적 차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 취향, 태도, 교육, 인맥, 자신감, 그리고 세계를 대하는 방식 속에 내면화된 보이지 않는 장벽이다.
보르디외가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근대사회는 겉으로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계급이 가진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이 자연스러운 능력처럼 오인되며 세대 간에 재생산된다. 아비투스는 이처럼 불평등이 강제나 명령이 아니라 취향과 습관, 말투와 몸가짐, 선택과 가능성의 감각을 통해 유지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일종의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랄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상층이 자신을 지배층으로 잘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 귀족은 적어도 자신이 특권층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적 부르주아지'(지적인 자본가 계급)는 종종 자신을 오히려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집단, 또는 구체제의 반대편에 선 집단으로 이해한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소위 말하는 강남좌파의 기원은 프랑스의 캐비어 좌파이다.
캐비어 좌파는 자신은 노력했고, 공부했고, 시험을 통과했고, 그래서 이 자리에 올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노력의 출발선이 결코 평평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그 기울어진 출발선이 잘 보이지 않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럽 상층부가 오래도록 안정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의 특권은 더 이상 노골적인 배타성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대신 공정, 전문성, 교양, 책임, 유럽적 보편성 같은 아름다운 언어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 언어들은 때로 진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보호막이기도 하다. 누구도 공정과 교양 자체를 비판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럽의 지배는 억압보다는 세련미의 형식으로, 배제보다는 기준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결국 현대 유럽의 엘리트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왕관을 쓰지 않을 뿐이다. 과거 왕들의 왕관과 귀족의 실크 법복 대신 학위를 지니고, 제스처를 사용하고, 말투를 쓴다. 과거의 귀족이 혈통으로 자신을 증명했다면, 오늘의 지적 부르주아지는 능력주의의 언어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능력주의가 실제로는 아비투스를 통해 세습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과연 완전히 공정한 질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유럽의 내부를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면, 근대는 종종 귀족제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더 우아하게 번역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유럽의 상층을 움직이는 것은 과시된 힘이 아니라 내면화된 우월감이고, 노골적인 배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라는 이름의 선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