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해 9월 중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낸 근로자 A씨는 같은 해 11월 중순에서야 첫 심문회의에 섰다. 구제 신청이 기각된 지 약 한 달 만인 12월 중순 판정서를 받아 곧장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결과는 받아든 건 이달 초. 첫 구제 신청부터 재심 판정까지 9개월이 걸린 셈이다. A씨는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민사소송으로 갔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A씨와 맞서 공방을 벌였던 사용자 B씨는 노동위원회 판정 지연으로 부담이 커졌다. 중노위에서 초심 판정을 뒤집고 A씨에 대한 부당해고가 인정됐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중노위 판정이 지연된 6개월간 근로자 A씨에게 지급해야 할 '임금상당액'이 초심 기간과 합산해 총 9개월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B씨는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다가 패소했을 때 발생할 막대한 지출이 두려워 9개월분 임금을 지급한 뒤 권고사직 형태로 '화해'했다. 그는 "중노위 판정이 정상적으로 두 달 만에 나왔다면 부담도, 대응 방식도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늘어지는 '노동 분쟁'…실무 현장선 "AI 써라"

29일 노동실무 연구모임 흥미로운연구소에 따르면 노동위원회 판정 지연이 근로자와 사용자 양측 모두에 리스크로 확대되면서 노무 업계 일각에선 '인공지능(AI) 활용'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일선 노무사들은 최근 AI로 작성된 장문의 서면이 쏟아지면서 노동위원회 심리·판정이 지연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과거엔 노무사나 변호사 손을 빌려야만 했지만 이젠 당사자가 직접 AI를 활용해 이유서·답변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됐다. 당사자가 직접 분쟁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이유다.

하지만 이는 사건당 서면 분량을 대폭 늘리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분쟁의 장벽이 낮아진 만큼 사건 수뿐만 아니라 서면 분량도 급증한 것이다. 몇 장이면 충분했던 서면이 수십장으로 늘어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노무사·변호사 손을 거쳐 쟁점과 핵심을 담아 전달됐던 서면은 '텍스트 폭탄'으로 변모했다.

문제는 서면 분량이 늘었다고 쟁점이 선명해지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AI가 만든 서면엔 일반론에 치우친 장황한 설명, 중복 표현, 사안의 쟁점과 무관한 법리가 나열돼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판례나 법조문을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할루시네이션(환각)' 문제도 드러난다. 노동위 조사관은 이 모든 불필요한 문장들을 속에서 사실관계와 쟁점을 걸러내야 한다. 사건 상대방 대리인은 쟁점과 무관한 주장에도 반박해야 하는 불필요한 부담을 떠안게 된다.

이에 노무 업계에선 방대한 서면을 요약하고 쟁점을 추출하는 도구로 AI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흥미로운연구소는 AI 기반 서면 스크리닝으로 구제 신청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건을 걸러내고 방대한 서면을 자동 요약해 쟁점을 추출하는 기능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서면에 인용된 판례·법령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도 AI로 1차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표준 서식·분량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 불필요한 서면이 쏟아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법원과 다른 노동위 '신속성', 사건 증가에 '퇴색'

이 같은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는 노동위원회의 존재 이유인 '신속성'이 흔들리고 있어서다. 노동위원회규칙 제51조는 사건 접수일부터 60일 이내에 심문회의를 열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서울·경기지노위만 해도 사건 접수부터 심문회의까지 최소 3개월, 중노위 재심도 6개월 이상 걸린다는 것이 일선 노무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중노위에 따르면 노동위의 사건당 평균 처리기간은 2024년 50.1일에서 지난해 52.7일로 늘었다. 중노위 사건의 경우 이 기간 93.8일에서 114.6일로 급증했다. 2024년 기준 민사합의 1심은 평균 14.6개월, 민사단독 1심은 5.5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실무 현장에선 초심 구제 신청 제기부터 재심 판정서 송달까지 걸리는 실질적 분쟁 기간을 모두 합산할 경우 통상 11~12개월이 소요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처리기간이 지연되는 가장 큰 원인은 '사건 증가'다. 노동위 접수 사건은 2021년 1만7800건에서 2023년 2만1691건, 2024년 2만4265건으로 늘다 지난해 2만6806건으로 증가했다. 해마다 역대 최다를 기록하는 중이다. 경기 불황 장기화에 따른 구조조정·해고 증가, 직장 내 괴롭힘 법제화 등 노동법으로 규율되는 영역이 확대되면서 분쟁 유형도 한층 다양화됐다는 분석이다.

인프라 부족도 사건 처리를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사건은 대폭 늘고 있지만 노동위 조사관 인력 충원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노동위 판정을 맡는 공익위원 수도 노동위원회법상 위원 수 상한에 묶여 증원도 쉽지 않다.

소민안 지정노무법인 부대표 노무사는 "노동위의 신속성·전문성은 단순한 제도의 특징이 아니라 일터의 평화를 떠받치는 핵심 가치다. 지금의 지연 사태를 방치하는 것은 근로자에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을, 사용자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경영 리스크를 전가하는 일"이라며 "AI가 분쟁의 입구를 활짝 열어젖힌 지금 노동위원회가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격차는 더 빠르게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제도 개선이란 중장기 담론 뒤에 숨을 때가 아니라 공익위원 다변화와 인력 충원, 양방향 AI 활용 등 당장 실행 가능한 긴급 대책을 전면 시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