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 5일 연속 올라 또 1,550원 근접 /사진=연합뉴스
원/달러 환율, 5일 연속 올라 또 1,550원 근접 /사진=연합뉴스
"환율이 미친 것 같아요. 프로그래밍에 쓰는 AI 서비스 요금으로 이번 달에만 17만원을 냈습니다."

전날(2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프리랜서 개발자 박모 씨(29)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쓰는 챗 GPT·클로드 등 생성형 AI 서비스는 구독료를 달러 기준으로 청구한다. 이에 환율이 오르면 가격 부담이 그만큼 커진다. 박 씨는 "프리랜서라 수입이 불규칙한데 업무에 AI 툴을 안 쓸 수도 없어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한 달 이상 1500원대를 유지한 가운데 1550원 선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26일 원·달러 환율은 1547원에 출발해 장 초반 1549원까지 올랐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한복판이던 2009년 3월 9일(1549.0원) 이후 16년여 만의 최고치다. 이에 따라 AI 서비스 구독료뿐 아니라 식료품 구매와 해외여행 경비까지 시민들의 생활 부담이 전방위로 커지고 있다.

◇ 마트도, 휴가도…일상 파고든 고환율

한 시민이 신촌 내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 /사진=이정우 기자
한 시민이 신촌 내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 /사진=이정우 기자
인근 대형마트에서 만난 김모 씨(52)는 수입 과일 코너 앞에서 한참 가격표를 들여다봤다. 김 씨는 "예전 같으면 그냥 담았을 것도 요즘은 가격 부담에 두세 번 망설인다"며 "고환율·고유가 때문에 물가가 더 오를 수 있다고 들어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 수입 먹거리 가격은 줄줄이 오르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수입 망고는 개당 5858원으로 1년 전보다 33.4% 올랐다. 같은 기간 미국산 네이블 오렌지는 10개당 1만8695원으로 22.4%, 국산 척아이롤(냉장)은 100g당 4073원으로 21% 상승했다.

먹거리 물가 상승 압력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한국은행이 이달 발표한 5월 수출입물가지수를 보면 지난달 수입 물가(원화 기준)는 1년 전보다 24.8% 올랐다. 2022년 7월(25.6%) 이후 최대 상승 폭이다.이에 따라 최근 식음료업계는 잇달아 가격 인상에 나서는 모습이다. 롯데칠성음료는 환율 상승에 따른 원액 수입 비용 증가 등을 이유로 이날부터 12개 브랜드 44개 품목의 출고가를 평균 5.3% 올렸다. 이디야커피도 지난달 6일부터 스틱커피·커피믹스 제품 가격을 4.3~15.2% 인상했다.
기사 내용과는 무관한 사진 /사진=한경DB
기사 내용과는 무관한 사진 /사진=한경DB
해외여행을 준비하던 이들도 고환율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직장인 최모 씨(31)는 "지난해부터 올여름 휴가 때 미국에 가려고 비행기를 예약해뒀다. 그런데 환율이 떨어질 기미가 없고 경비가 부담돼 일정을 취소했다"며 "환율이 잡힐 때까지는 국내로 휴가를 떠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데이터 전문기업 PMI가 전국 만 20~59세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 5~10일 시행한 '2026년 여름휴가 관련 조사'에서 올여름 휴가 비용이 부담된다는 응답은 45.7%로 집계됐다. 보통이라는 응답은 41.3%, 부담되지 않는다는 응답은 13.0%였다. 이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거리가 아니라 근거리 여행지를 택하겠다는 응답이 36.5%로 가장 많았으며, 해외 대신 국내로 눈을 돌리겠다는 응답도 36.1%를 기록했다.

◇ 정부 "단기 현상"…전문가 "구조적 문제"

23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의 환전소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환전소에서 환전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23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의 환전소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환전소에서 환전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정부는 이 같은 고환율을 외환 수급 불균형에 따른 단기 충격으로 보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23일 국무회의에서 "외국인이 보유 주식을 10% 정도, 140조원 정도를 매각한 것으로 보는데 그걸 환전하면서 환율이 올랐다"며 "리밸런싱(자산 재조정)이 마무리되면 환율도 점차 안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같은 날 "환율 수준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에 비해 과도하다"면서도 "시간이 문제"라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단순 주식시장 리밸런싱만으로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고환율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외국인 투자자금 유출도 원인 중 하나지만 미국 고금리와 강달러, 중동 정세에 따른 불확실성 등 대외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통화량 확대와 재정 지출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 한국의 저성장과 산업 경쟁력 약화도 원화 약세를 키우는 요인"이라며 "이런 요인들이 단기간에 개선되기 어려워 고환율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에 달러 유입을 위해 기업의 투자 유인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은 꾸준히 들어오는 달러인데, 지금은 국내외 기업이 한국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노란봉투법 등도 가이드라인을 명확히 해 단순화하는 등 시장의 신뢰를 높여 투자 환경을 빨리 조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정우 한경닷컴 기자 krse905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