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노르웨이의 선택, 베네수엘라의 선택
1980년대 북해 유전 개발로 막대한 부를 얻은 노르웨이는 거센 복지 확대 압력에 직면했다. 그러나 당시 총리인 그로 할렘 브룬틀란 등 정치 지도자들은 분명한 대원칙을 세웠다. 석유 수익을 당장의 소비가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자산으로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르웨이는 1990년 국부펀드를 조성했다. 석유 수익을 모아 해외 자산에 투자했고 ‘4% 재정 룰’을 통해 투자 수익 일부만 당해 연도 예산에 넣었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도 복지 확대 속도를 조절하며 석유를 ‘현재의 소득’이 아니라 ‘미래 세대 자산’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국부펀드는 오늘날 약 2조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 연기금으로 성장했다. 노르웨이는 영국 레가툼연구소의 2023년 번영지수에서 세계 3위를 차지했다.

반면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우고 차베스 정부는 2000년대 고유가 시기 막대한 석유 수익을 축적보다 분배에 집중했다. 보조금과 복지 확대는 여론의 지지를 얻었지만 유가 하락 이후 산업 기반 붕괴와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남미에서 손꼽히는 부국이던 베네수엘라는 2023년 번영지수에서 151위까지 밀려났다. 같은 자원도 어디에 투자하고 어떻게 배분하는지에 따라 국가 미래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반도체는 석유만큼 중요한 전략 자산이 됐다. 대만 TSMC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만은 수십 년간 반도체 연구개발과 산업 인프라 확충에 국가 역량을 집중했다. 그 결과 TSMC는 대만 경제와 안보를 떠받치는 ‘호국신산(護國神山)’이 됐다. ‘TSMC가 살아야 대만이 산다’는 사회적 공감대 속에서 기업은 이익을 연구개발과 설비에 재투자하며 신뢰에 응답해왔다. 한국 사회엔 전략산업을 국가 자산으로 바라보는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 경제 핵심 축이지만 이를 ‘호국삼성’ ‘호국SK’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최근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성과급 논란 이후 현대자동차 LG 카카오 등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과 공공 부문까지 성과급 요구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농어촌 배당론과 국민 배당론도 거론된다. 노조도, 정치권도, 정부도 저마다 몫을 요구하며 ‘분배 파티’에 뛰어드는 형국이다.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세계를 주도할 울트라 빅테크를 키우자는 비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오라클 등 미국 빅테크의 올해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규모는 10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년 치 영업이익을 합친 규모다. 반도체는 더 이상 하나의 산업이 아니다. 국가 안보와 외교·통상, 금융, 국가 영향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다. 세계는 AI와 반도체를 둘러싼 총력전에 들어갔다.

AI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맞물린 이번 대호황은 한국이 반도체를 통한 기술 패권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다. 그런데 지금의 초과이익을 단기 성과급과 각종 현금성 분배로 대부분 소진한다면 그것은 미래 세대 몫을 앞당겨 소비하는 ‘세대 약탈(intergenerational plunder)’에 가깝다.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6515조원의 국가 총부채를 감안하면 우리는 미래 세대에 자산이 아니라 부채만 남길 위험에 직면해 있다.

사실 우리도 미래 세대를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경험이 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확보한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집중 투입한 사례다. 당시에도 거센 반대와 갈등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초석이 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 시대에 걸맞은 ‘전략 국가형 리더십(strategic state leadership)’이다. 브룬틀란 노르웨이 총리처럼 미래 세대를 위해 현세대의 양보를 이끌어낼 용기, 독일 ‘아젠다 2010’처럼 고통스럽더라도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할 결단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리더십과 지도자의 안목이다. 30년 뒤 미래 세대는 오늘의 한국과 이재명 정부의 선택을 평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