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반도체
“윤석열 내란을 끝내는 길은 삼성전자의 용인 반도체 공장을 전북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올해 초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SNS에 올린 글이다. 이때만 해도 다들 그냥 어리둥절해했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온 정치적 수사로 여겼다. 그런데 지방선거가 끝난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일 취임 1년 기자회견에서 “영호남 (불균형) 문제가 있어서, 호남에 균형을 좀 맞춰야 한다”고 밝힌 뒤부터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도 같은 취지의 글을 SNS에 올렸다. “반도체는 방대한 전력과 물, 정밀화학 소재가 맞물려야 하는 장치 산업이다. 에너지·물류 강점을 가진 거점으로 ‘멀티허브’를 구축해야 한다.” 낭설로 여겨지던 ‘호남 반도체 공장’은 어느새 ‘기정사실’이 됐다.

나름의 일리가 있는 대목도 있다. 수도권에 몰린 공장과 인력 과밀을 해소하고 지역 균형 성장을 위해 생산설비를 분산해야 한다는 지적엔 고개가 끄덕여진다. 수도권 전력난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경기 지역의 전력 자립도는 60%를 밑돌지만, 전남엔 전기가 남아돈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초미세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과 완성된 칩을 자르고 포장하는 후공정으로 나뉘는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검토하는 패키징(후공정) 공장은 설비 분산이 용이하다는 관측도 있다. 전공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입지 제약과 초기 투자 부담이 작기 때문이다.

두 기업의 속내는 복잡하다. 긍정도 부인도 못 한 채 “정해진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치권의 압박을 마냥 뭉갤 수도 없는 처지다. 결국 ‘풀어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이런 상황을 두고 “새 사업 후보지를 찾는 것은 숙제”라고 했다.

‘삼전닉스’는 물밑에서 호남 반도체 공장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패키징 공장 후보지로 광주를 최우선 순위로 검토하는 동시에 새만금 카드도 함께 테이블에 올려놨다. SK하이닉스 역시 광주와 전남 무안 등에 반도체 후공정 생산 거점을 마련하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자의든 타의든 두 기업은 이달 말 투자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들이 정부 정책 기조에 호응한 만큼 정부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먼저 신규 공장 후보지를 규제 예외 지역으로 인정해주는 ‘국가 전략사업 부지’로 지정해야 한다. 용수 공급을 위한 인프라와 발전, 송·배전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선제 지원도 필요하다. 기업이 땅과 물, 전기를 구하러 돌아다니게 할 순 없다. 반도체특별법 시행령을 손봐서라도 전력, 용수, 도로 등 기반시설 조성을 위한 사업비의 최소 50%에서 최대 전액을 국비로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보길 권한다.

더 중요한 건 수도권 근무를 원하는 고급 인력을 지방에 붙잡아두는 것이다. 직주근접과 인센티브 문제를 해결하는 등 실질적인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져야 3~5년 뒤 호남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수 있다.

무엇보다 세부 투자 규모와 입지 결정 과정에서 기업과 기업인의 결정권이 존중돼야 한다. 언제, 어떤 규모로,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관료, 주주, 근로자 등에게 휘둘릴 일이 아니다. 그래야 미국 빅테크의 견제와 중국 기업의 추격을 따돌리고 압도적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게 ‘반도체의 나라’가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