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인터뷰
10년차 런더너, 32세 RCM 교수
영감을 받는 공간과 음악가로 철학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지역, 로얄 알버트홀 앞에 위치한 왕립음악대학(RCM). 조민선 기자.
영국 런던 최대 규모의 공원인 하이드파크. 길 하나만 건너면 영국 최고의 부촌 켄싱턴 지역이다. 빅토리아풍 붉은 벽돌 건물들이 쭉 늘어선 이 지역엔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연장, 로열 알버트홀이 있다. 그 후문을 나서면 세계 최고의 음악대학으로 꼽히는 런던 왕립음악대학(Royal College of Music)이 보인다. 켄싱턴이 특별히 아름다운 건 문화와 예술, 자연이 어우러진 완벽한 조합 덕분이다.
런던에서 가장 큰 공원인 하이드 파크. 로얄 알버트홀과 RCM의 이웃이다. 조민선 기자.
음악가에게 런던은 장단점이 뚜렷한 곳이다. 유럽 내 음악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뉴욕 못지않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가 깔려있다. 하지만 제국의 역사가 뿌리 깊은 이곳에서 주류가 되는건 쉽지 않다. 뉴욕이나 베를린, 파리에 비해 런던에 뿌리를 내린 한국 음악가가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한국명 유지연·32)는 그 좁은 길을 뚫었다. 지난해 9월 RCM의 현악 파트 교수로 임용된 것이다. RCM은 국내 '한예종'과 같은, 세계 최고의 음악대학 중 하나다.
미국에서 태어난 에스더 유는 4세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12세에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청소년 부문을 석권하며 일찌감치 주목받았으며, 이후 유럽을 무대로 성장했다. 2010년 시벨리우스 콩쿠르 3위, 2012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4위를 거쳤고, 2018년에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아티스트로 활동하며 런던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도이치그라모폰(DG) 전속 아티스트로 4장의 앨범을 낸 솔리스트다.
세계 무대를 누비는 현직 솔리스트가 교직에 선 것. 32세의 젊은 나이, 한국계라는 정체성, 여성 음악가의 장벽 등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발탁이다.
지난달 잠시 한국에 들른 에스더 유와 만났다. 그의 삶의 터전인 런던에서 음악가로 산다는 것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런던, 영감이 도처에 있는 도시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가 서울 강남구의 유니버설뮤직 본사에서 아르떼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문경덕 기자.
에스더 유는 코스모폴리탄이다. 뼛속 깊이 한국인인 그는 미국, 벨기에 등 다양한 도시를 거쳐 런던에 정착했다. 켄싱턴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인 지역에서 10년째 거주 중이다.
"런던은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활발한 도시 중 하나예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영감을 끊임없이 얻을 수 있는 곳이죠."
그가 런던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음악, 연극, 뮤지컬 등 공연이 365일 어디서나 열리기 때문이다. 로열 알버트홀을 비롯해, 125년 전통의 실내악 공연장 위그모어홀, 런던 필하모닉이 상주단체로 있는 바비칸 센터, 사우스뱅크의 로열 페스티벌홀, 첼시의 카도간 홀 등. 클래식 공연이 쉬지 않고 열린다. 거기에 웨스트엔드 연극과 뮤지컬까지. 공연 예술가라면 호사를 누리는 곳이 바로 런던이다.
"런던에 있으면 적어도 주 1회는 공연을 보러 가요. 다른 음악가들의 연주를 보면서 가장 많이 배우거든요. 제겐 이 자체가 엄청난 럭셔리에요."
런던 최대 규모의 다목적홀 로얄 알버트홀. 조민선 기자.
클래식 음악가지만, 장르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코톨드 갤러리, V&A 등 전 시대를 아우르는 미술관들이 밀집한 이 도시에서 다양한 전시를 두루 본다. 최근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보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영감을 갈구하는 음악가에게, 다양한 예술 경험이 넘치는 런던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RCM, 학생에서 교수로
10년째 런더너였지만, RCM의 교수가 될 것이란 생각은 안 해봤다. RCM은 그가 2022년 석사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한 모교. 학교 측 이메일을 받은 것은 지난해 7월. 새벽 3시. 한국에서 음반 발매를 앞두고 인터뷰를 준비하던 때였다.
"I would like to offer you a professorship. 당신에게 교수직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라서, 이메일 내용을 잘못 읽은줄 알았어요. 눈을 비비고, 진짜 교수 제안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너무 놀랐죠. 아직 연주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교수가 되기엔 나이가 어렸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제안이 들어오니 망설임보다 영광스러운 마음이 더 커서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2025년 9월, 에스더 유는 모교의 학생 카드 대신 직원 ID카드를 받아들고 첫 출근을 했다. 누가 봐도 학생 같은 외모인 '새내기 교수'의 잊지못할 에피소드다.
"교수로 첫 출근 직전에 스태프 카드를 받으러 갔는데, 직원이 'Are you a student?'라고 묻더라고요. 아직도 학생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때마다 재미있어요"
'현직 솔리스트의 교수 임용'은 학교가 추진 중인 새로운 변화의 일환이다. 관리자부터 교수진, 프로그램 등에 걸쳐 학교는 180도 바뀌고 있다. 목표는 뚜렷하다. 졸업 후에도 사회에 잘 적응하는 음악가를 길러내는 것.
"예전의 음악 교육 시스템은 솔리스트, 무대 위의 성과에만 집중해왔어요. 그런데 학교를 마치고 나가면, 모두 솔리스트가 될 순 없잖아요. 학생들이 생각했던 사회와는 너무 다르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죠."
정면에 로얄 알버트홀이 보이는 강의실. 에스더 유가 RCM 학생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 에스더 유 제공.
RCM에는 고정 교수실이 없다. 교수들은 레슨 스케줄에 맞춰 강의실을 예약하는 시스템. 에스더 유는 그중에서 창밖으로 로열 알버트홀이 정면에 보이는 방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학생 때도 느꼈지만, 로열 알버트홀을 보며 연습하면 더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마음이 들어요. 음악가들에겐 꿈의 홀이잖아요. 제게도 학생들에게도 특별한 방이에요."
2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방음도 완벽하지 않다. 옆방 소프라노의 노랫소리, 창밖 버스 소리, 사람들의 인기척이 다 들린다. 하지만 그는 창밖의 소음을 음향처럼 즐긴다. "저는 소음이 싫지 않아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음악을 함께 만들고 있다고 느껴요."
음악가들에겐 꿈의 무대인 로얄 알버트홀에서는 RCM 학생들이 주기적으로 작은 무대를 갖는다. 조민선 기자. 가르친다는 것, 함께 성장하는 것
새내기 교수인 에스더 유는 어떤 교수일까. "제 생각을 학생에게 주입하지 않아요. 그 학생이 뭘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려 하죠. 두 음악인이 함께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랄까요. 저도 배우고, 학생들도 배웁니다." 이제 두 학기째지만 그는 가르치는 것이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의 소통임을 깨닫고 있다.
그 깨달음은 뜻밖의 순간에 온다. 그가 수십년간 체화해온 방식을 학생에게 말로 설명하려는 순간. 스스로 질문에 맞딱드린다고. '이 방법이 맞을까,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까지 해온 방식대로 꼭 해야 하는건 아니지 않나.' 등등. 학생을 가르치며 그도 새로운 방식을 찾는다.
학생들과 소통하며, 가장 뿌듯한 순간은 언제일까. "칭찬은 오히려 쉬워요. 하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약점이나 두려움을 말하는건 (서로간)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학생이 자신의 취약점을 털어놓으며 상담을 청할 때, 그순간이 가장 의미있다고 그는 말한다.
음악으로 치유하는 사람
에스더 유는 때로 언니처럼, 친구처럼 학생을 대한다. "제가 학생일 때 돌아보면 '나만 힘든가봐'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수십년간 철처히 외로운 시간을 거쳐 성장한 음악가 선배가 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이다.
음악가는 악기를 다루는 스킬만큼 정신력이 중요하다. 어려서부터 고통스러운 연습 시간을 견뎌야 음악가로 성장한다.
오래전부터 정신 건강에 관심이 있던 그는 최근 정신 건강 응급 처치사(MHFA) 공인 자격증을 땄다. 2018년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RPO) 상주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케임브리지의 젊은 학생들을 위한 '음악 치료 워크숍'을 직접 기획하고 운영했다.
"RPO 단원들, 그리고 제가 아는 젊은 작곡가 친구와 함께 방문했어요. 세상을 향해 문을 닫은 친구들이었는데, 말로는 표현 못한 것들을 악기 연주로 꺼내기 시작하더라고요. 함께 작곡을 하고, 시 워크숍도 했어요"
식이장애, 자폐, 조울증, ADHD 등 심각한 정신 건강 문제를 안고 살아가던 학생들이었다. 몇 년 후, 워크숍 때 만난 한 친구가 공연장을 찾아왔다. 눈에 띄게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음악 치료 워크숍이 너무 도움이 됐다고 말해줬어요. 그 순간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습니다."
그 경험이 그를 바꿨다. 레슨 중 학생들의 심리적 어려움을 듣고 돕는 데도 집중한다. "레슨하다 보면 연주 얘기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학생들의 고민을 어떻게 하면 잘 도와줄 수 있을까 리서치하다가 이 프로그램을 알게 됐어요." 그렇게 취득한 것이 MHFA 자격증이다. "치료사가 될 수는 없지만, 위기에 처한 학생을 도울 수 있게 됐습니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문경덕 기자.
에스더 유는 뼛속 깊이 한국인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독일, 벨기에, 영국을 거쳤고, 지금도 전 세계를 누비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은 뚜렷하다. "어릴 때부터 많은 나라와 문화를 경험하는 건 정말 좋았어요. 하지만 늘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죠." 세계를 누비는 삶이 그 질문을 더 깊게 만들었다고.
전환점은 코로나19였다. 2년 가까이 한국에 머물며 처음으로 한국인으로 살아봤다. "이전엔 한국인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한국인이구나 하는 정체성이 크게 다가왔죠." 지금도 런던 플랫(아파트)에서 직접 된장찌개를 끓이고, 김치찌개를 만들고, 불고기를 굽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김치찌개가 간절해진다"는 그는 천상 한국인이다.
음악가로 산다는 것
음악가의 삶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뚜렷하다. 좋은 연주, 훌륭한 음악가와의 만남이 있는 날엔 기분이 한껏 올라간다. 그래서 내려올 때의 낙차도 크다. "감정을 많이 담아내는 일을 하다 보니, 심리적 변동이 더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 어려움을 어떻게 버티느냐고 물었다. "거부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예요."
최근 한 학생이 '연습이 싫을 때가 없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연습하기 싫은 날은 있다. 하지만 음악이 싫은 적은 없었다"며 "일시적으로 힘든 것과 근본적으로 싫어지는 것은 다르다. 음악을 듣고,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일시적인 어려움은 지나간다"고 했다.
지루한 시간을 견디며 연습해야 할 때는 어떻게 이겨냈을까. "연습은 양보다 질이 중요해요. 몸이 너무 아프거나 정신적으로 힘들 때 억지로 악기를 잡는 것보다, 악보를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머릿속으로 연습하는 방법도 있어요." 쉬어야 할 때 쉬는 것도 연습이라는 것,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음반, 그리고 앞으로의 무대
지난 4월. 세계를 누비며 연주하고 교단에 서는 동시에 새 음반을 냈다. DG를 통해 발표한 네 번째 앨범 <사랑의 향연(Love Symposium)>. 레너드 번스타인의 '세레나데', 엘가의 '사랑의 인사' 등 사랑을 주제로 한 곡들을 엮었다.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위룽)가 함께했다. "사랑에 정답이 없듯 음악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예요. 현실에서 겪는 솔직하고 복잡하며 때로는 엉망진창인 진짜 사랑의 세계를 소리로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의 삽입곡 '네버 이너프(Never Enough)'를 편곡해 수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유니버설뮤직 제공.
올해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투어를 앞두고 있다. 레퍼토리는 번스타인의 '세레나데'. 번스타인의 제자인 지휘자 마리나 오즈만과 함께한다. "최근에 번스타인을 녹음했고, 그의 제자와 함께 연주하게 됐어요. 이 인연들이 이어져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내년 6월엔 위그모어홀 무대가 두 차례 예정돼 있고,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와의 협연도 준비 중이다.
런던의 플랫, 바이올린 케이스
무대 위의 에스더 유가 아닌, 일상의 에스더 유는 어디서 숨을 고를까.
에스더 유가 런던 집에 걸어둔 흑백 말 사진. 에스더 유 제공.
런던 사우스켄싱턴 일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말과 기마경찰. 조민선 기자.
로열 알버트홀이 내다보이는 강의실이 영감을 받는 공간이라면, 집은 온전히 쉬어가는 공간이다. 런던의 플랫. 한쪽 벽에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 말 머리가 거꾸로 담긴 흑백 사진. 그가 가진 유일한 작품이다. "몇 년째 거실 벽에 걸어두고 보는데, 볼 때마다 행복해요. 말을 보면 힐링, 여유, 그리고 자유를 느껴요."
어릴 때부터 말을 좋아했다. 벨기에에서 자라며 숲과 마구간을 가까이 했고, 요즘은 RCM 앞을 지나는 기마 경찰 말들의 발굽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따그닥 따그닥 줄지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혼자 연습하다가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느낌이 들어요."
에스더 유 바이올린 케이스 내부. 에스더 유 제공.
그는 이날 바이올린 케이스 안의 보물들을 선뜻 보여줬다.
가족의 응원 카드, 동료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 팬들이 건넨 편지들, 그리고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이 직접 써준 감사 카드가 꽂혀있었다. 8년 전 투어에서 처음 협연한 짐머만은 공연이 끝난 후 꽃바구니와 함께 카드를 건넸다고. 에스더 유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두고 "환상적이었다"고 적어 보낸 카드였다. "카드를 받고 펑펑 울었어요. 클래식 음악계의 대가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어요."
바이올린 케이스에 들어있던 사진과 카드들. 에스더 유 제공.
연주자, 교수, 정신 건강 응급 처치사. 에스더 유의 활동 반경은 폭넓다. 음악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음악가였다. 끝으로 그가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 물었다. '귀족적이고 우아한 소리'라는 평을 들어온 그는 이제 반대편의 소리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소리가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조금 늦게 배웠어요. 거칠고 투박한 음색도 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필요할 수 있다는 걸요. 그리고 제가 원래 생각했던 소리와 완전히 다르게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발견이 정말 재미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