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6월 9일 오후 3시 43분 한국경제신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프리미엄9'에 게재됐습니다.

삼성전자의 국내 반도체 생산 기지 가운데 패키징(후공정)을 담당하는 충남 천안·온양 캠퍼스는 그동안 경기 평택·기흥 등 전공정(팹) 라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았다. 웨이퍼 위에 미세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 경쟁에 밀려 열과 오염으로부터 반도체를 보호하는 패키징 작업은 후순위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인공지능(AI) 열풍이 불면서다. 회로 미세화가 물리적 한계에 봉착하자 반도체 여러 개를 마치 하나의 칩처럼 결합하는 첨단 패키징이 AI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할 핵심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삼성전자가 기존 충청권을 넘어 호남 지역에 신규 패키징 기지를 구축하는 승부수를 던진 배경이다.

◇ 미세 공정 한계 극복할 ‘게임체인저’

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광주에 첨단 패키징 공장을 건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오는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는 삼성 등 주요 그룹 총수 대상 간담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투자 계획이 논의 대상에 오를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 이어 광주에도…삼성전자, 35년 만에 새 '패키징 거점'
삼성전자는 당초 첨단 패키징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온양 사업장을 새로 단장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지방 균형 성장과 현지 AI 반도체 생태계 추가 조성 등을 고려해 호남 지역을 제2의 거점으로 낙점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가 패키징 공장 확장에 속도를 내는 것은 고객사의 첨단 패키징 수요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대표 제품이 여러 개 D램을 수직으로 쌓은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삼성전자는 HBM4(6세대)를 지난 2월 업계 최초로 엔비디아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AMD, 브로드컴 등 글로벌 AI 반도체 기업이 삼성전자의 HBM4를 확보하기 위해 줄을 서 패키징 생산능력 확충이 시급해졌다.

HBM뿐만 아니라 사각형 기판 위에 여러 개의 칩을 배열하는 2.5D 패키징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부가 테슬라와 협력해 제조하는 차세대 AI 칩 AI5에도 메모리와 AI 칩을 결합하는 최첨단 2.5D 패키징이 활용된다.

문제는 국내에서 고난도 2.5D 패키징을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는 사실상 삼성전자 천안캠퍼스가 유일하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내년까지 천안 생산라인 증설을 추진하고 있지만 밀려드는 글로벌 물량을 감당하기엔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 ‘원스톱 솔루션’으로 TSMC 추격

업계에선 이번 신규 거점 확보로 삼성전자가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의 요구에 적극 대응하며 파운드리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삼성전자만 제공할 수 있는 ‘원스톱 턴키(일괄 생산) 서비스’다. 빅테크 고객사가 설계도만 들고 오면 파운드리 공정을 거쳐 최첨단 HBM을 장착해 최종 패키징까지 전 과정을 삼성전자 내부에서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이런 일괄 공정 체제가 되면 전체 납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업계 1위인 대만 TSMC에 비해 공급망 효율성 측면에서 확실한 비교 우위를 점한다. TSMC의 패키징 공급 부족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빅테크로서도 삼성전자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이번 투자를 계기로 SK하이닉스와의 패키징 기술 대결에서도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구상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주력이 될 HBM4E(7세대)부터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을 일부 도입할 예정이다. 이 기술은 칩과 칩 사이에 선(범프)을 쓰지 않고 구리를 직접 접합해 두께를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첨단 기술이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광주 신공장 건설은 한계에 다다른 생산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려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축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해령/김채연/원종환 기자 hr.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