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구하는 건 영웅이 아니야…깨진 갑옷에서 피어나는 진짜 연대
“인간은 왜 이미 끝난 것들을 끝내지 못하는가.”

지난 5~7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한 캐나다 현대무용단 키드 피봇의 신작 ‘어셈블리 홀’(사진)이 던지는 질문이다. 안무가 크리스탈 파이트와 극작가 조너선 영이 이끄는 단체의 첫 방한작으로, 대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며 몸과 언어를 동등한 서사 도구로 활용한 독특한 무용극이다.

작품의 배경은 해체 위기에 몰린 동호회 ‘자애와 보호의 기사단’이 마지막 총회를 여는 낡은 마을 회관이다. 현실의 소박한 공간이지만, 등장인물은 어느 순간 중세 기사 서사와 성배 탐색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상처 입은 왕을 구원하기 위해 성배를 찾아 나선 기사 ‘파르지팔’ 신화가 중요한 모티프다. 장부를 정리하던 인물이 갑자기 방패를 들고 검을 겨누며, 해체 위기에 놓인 공동체의 운명은 황폐해진 왕국을 구원해야 하는 기사들의 탐색담과 겹친다.

질문은 공연 내내 반복되는 ‘미결 안건(Unfinished Business)’이라는 말속에 응축돼 있다. 이는 표결과 해산 절차를 둘러싼 현실적 압박이자 끝내 완수하지 못한 기사들의 사명이며, 더 나아가 인간이 평생 품고 살아가는 상실과 미련, 외로움의 은유다. 일상적 풍경 사이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울려 퍼질 때 현실과 환상의 간극은 더 벌어진다. 평범한 이들이 내면에서는 여전히 영웅적 서사를 꿈꾸고 있음이 웅장한 선율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중반부 남성 무용수의 독무는 작품의 정서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날개 부러진 새처럼 몸을 뒤틀며 바닥을 기어가는 움직임은 영웅 신화의 붕괴와 인간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이는 고전 발레의 상징인 백조의 신체 언어를 현대무용으로 해체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말로 드러내지 못한 외로움과 상처가 폭발하듯 분출되며, 관객은 지금까지의 유머가 사실은 깊은 상실감 위에 세워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작품이 제시하는 해체의 의미는 파멸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던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과정이다. 극 중 기사단은 외로운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안전한 껍질이었다. 현실에선 존재감 없던 회원 데이브가 환상 속에서만 위대한 지도자로 변모하는 모습이 이를 상징한다. 후반부의 만장일치 해산은 공동체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다. 그들은 단체를 포기한 것이지 서로를 포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메시지를 가장 아름답게 시각화한다. 파르지팔이 상처 입은 왕에게 던져야 했던 질문(“무엇이 당신을 아프게 하는가”)을 연대의 언어로 변주한다. 데이브의 거대한 갑옷은 조각조각 분해되고, 남은 회원은 그 파편을 하나씩 나눠 들고 무대를 떠난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도 함께 나누면 견딜 수 있다는 진실이 담긴 지점이다.

‘어셈블리 홀’이 해체하는 것은 기사단이 아니라 영웅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오래된 신화다. 구원이란 거창한 서사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묻고 짐을 나누는 평범한 연대 속에 있다고 말한다. 차가운 갑옷 조각이 무용수의 맨손 위로 옮겨지는 순간, 공연은 관객 각자의 마음속 ‘미결 안건’ 역시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