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연구개발(R&D)을 책임지는 남양연구소 임직원을 대상으로 중국 전기차 시승 및 품평 행사를 연다. 경쟁사 차량을 분해해 보는 방식이 아니라 임직원 대상 품평회를 여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중국 전기차의 기술력을 눈으로 확인해 보자는 취지다. ‘중국차=저가’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배울 건 배우겠다’는 전략 변화로 해석된다.
[단독] '중국車=싸구려' 무시하다간 당한다…현대차 파격 행보
25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 노사는 조만간 중국 차 시승 및 품평 행사를 열기로 하고 일정 조율에 들어갔다. 시승 차량은 국내에 진출한 비야디(BYD)를 비롯해 샤오펑, 샤오미, 리오토, 베이징자동차·화웨이 합작사인 스텔라토, 테슬라 등 6개 브랜드를 검토 중이다. 저가 전기차(BYD)부터 1억원이 넘는 프리미엄 브랜드까지 다양하게 포함됐다. 이 중 샤오펑, 샤오미, 리오토, 스텔라토는 아직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브랜드로 이번 행사를 위해 직접 차량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임직원들은 경기 화성시 남양연구소에 마련된 트랙에서 이들 차량을 운전해 보고 주행 성능, 자율주행 기능, 배터리 효율 등을 평가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 배경에는 그룹 내부에서 고조되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배울 건 배운다"…中 전기차 정밀검증 나선 현대차그룹
현대차그룹, 남양연구소서 中 전기차 품평회

중국 전기차 업체가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3년 전부터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 본토에서 출혈 경쟁이 극에 달하자 수출을 탈출구로 삼았다. 전략은 적중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유럽 중동 남미 아시아 곳곳에서 점유율을 1년 새 두 배 넘게 키웠다. 한국에서도 비야디(BYD)가 진출 11개월 만에 누적 판매 1만 대를 돌파했을 만큼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이제는 단순 수출을 넘어 현지화에 방점을 둔 ‘2.0 전략’으로 진화했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이례적으로 국내에서 중국 전기차 시승 및 품평 행사를 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방까지 밀고 들어온 중국 전기차의 실체를 연구개발(R&D) 직원들이 직접 보고 배우라는 취지다.

◇소형차부터 슈퍼세단까지

현대차그룹이 품평 대상으로 삼은 업체는 BYD, 샤오펑, 샤오미, 리오토, 스텔라토, 테슬라 등 6개인 것으로 알려졌다. 테슬라를 제외한 이들 브랜드는 중국 전기차 경쟁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최근 중국 전기차는 저가에서 프리미엄 영역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베이징자동차·화웨이 합작사 스텔라토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의 대형 전기 세단 S9은 최상위 모델이 중국 현지에서 44만9800위안에 판매돼 1억원에 육박한다.

샤오미는 포르쉐 타이칸을 겨냥한 고급 전기차 SU7 울트라를 내놨다. 이 차의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98초로 타이칸 터보 GT(2.1초)보다 빠르다. 하지만 가격은 81만4900위안(약 1억8000만원)으로 타이칸 터보 GT(약 3억원)의 60% 수준이다. 리오토는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전문 브랜드로 전 차종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미니밴으로 꾸렸다. EREV는 현대차그룹이 공을 들이고 있는 기술 중 하나다. BYD는 소형 전기차 ‘돌핀’을 2450만원에 판매하며 초저가 시장도 움켜쥐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술도 강점이다. ‘중국의 테슬라’로 불리는 샤오펑은 자율주행 선두 주자다. 폭스바겐을 상대로 자율주행 라이선스 수익을 확보한 덕에 지난해 4분기 서비스 매출이 121.9% 급증했다.

올해 안에 특정 구간에서 운전자가 개입하지 않는 자율주행 레벨4 수준의 신차를 생산하겠다고 예고했다. 이번 시승 대상에 이들 브랜드를 포함한 것은 저가부터 프리미엄까지 중국 전기차의 전 스펙트럼을 임직원들이 체감하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내수도 안전지대 아냐

현대차그룹 내부의 위기감은 커지고 있다. HMG경영연구원은 최근 사내 보고서에서 중국 완성차 업체의 국내 시장 위협도를 ‘중위협군’으로 격상했다. 보고서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중남미 호주 중동 아프리카에서 적신호가 켜진 상황이고 유럽과 한국에서도 위험도가 크게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전선의 경쟁도 녹록지 않다. 미국 시장에선 지난해 10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보조금 폐지 여파로 전기차 수요가 둔화했다. 중국 본토는 현지 업체들에 주도권을 내줬다. 그나마 버팀목 역할을 하던 유럽 중동 아시아 등에서도 중국 업체들이 점유율을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중국 업체의 진출 방식이 단순 완성차 판매를 넘어 ‘기술·플랫폼 수출’ 형태로 다각화하는 점도 위협 요소로 꼽힌다.

안방인 내수 시장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BYD의 지난달 국내 판매량은 2023대로 전체 수입차 브랜드 4위로 올라섰다. 중국에서 생산된 전기차 기준으로 보면 국내 점유율이 2022년 4.7%에서 지난해 33.9%로 급등했다. BYD에 이어 프리미엄 전기차 브랜드 지커는 이달 초 서울 강남에 전시장을 마련했다.

샤오펑은 지난해 6월 한국 법인을 설립했다. 샤오미도 국내 진출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중국 차의 강점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길성/김우섭/정상원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