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거닐다…세계 최대 '사유의 정원'
정원은 단순히 꽃과 나무를 심어 놓은 공간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누는 오래된 대화의 공간이자 한 국가의 철학이 압축된 장소다. 프랑스는 기하학적 형태의 베르사유 정원에서 이성과 질서를 봤고, 일본은 가레산스이의 모래 위에 자연의 본질을 담은 선(禪)의 정신을 새겼다. 그렇다면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정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경기 양평의 메덩골정원은 15년 전 꺼낸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9월 ‘한국정원’을 선보이며 개장한 메덩골정원은 다음달 새로운 공간 ‘현대정원’의 문을 연다. 한국정원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100년 넘게 끊긴 전통 정원의 맥을 되살린 공간이라면, 현대정원은 동서양 철학과 한국 근현대사를 압축해 눈이 아니라 마음을 흔드는 공간이다.

걸으면서 느끼는 동서양 철학

마음으로 거닐다…세계 최대 '사유의 정원'
새로 문을 여는 현대정원은 크게 두 공간으로 구성된다. 니체, 플라톤, 어린 왕자, 붓다 등 동서양의 사유를 걷는 경험으로 옮긴 ‘생각의 섬’, 그리고 선비의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조경의 언어로 풀어낸 ‘대한민국 이야기’다. 칠레 출신 건축가 마우리시오 페소가 주요 정원을 디자인했다.

생각의 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공간은 플라톤의 ‘이데아’다. 정사각형 광장 안에 스테인리스 기둥이 가로 10개, 세로 10개로 정확히 100개가 서 있다. 완벽한 이상 세계를 상징하는 숫자다. 기둥 꼭대기마다 노즐이 있어 100개 기둥 위로 물안개가 동시에 피어오른다. 잡을 듯하면 사라지고, 사라진 듯하면 다시 피어나는 물안개 속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이데아를 향하는 여정이 시작된다.

이데아의 공간을 지나면 붉은빛의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 파빌리온 ‘여정’이 나타난다. 이 돌은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대리석 레드 트래버틴으로 원산지는 이란이다. 어린 왕자가 별을 여행하듯 천천히 한 바퀴 돌면 한가운데 작은 우물에 하늘과 얼굴이 비친다. 어린 왕자가 자신만의 장미를 찾아나갔듯 나만의 장미를 찾아 나서는 공간이다.
마음으로 거닐다…세계 최대 '사유의 정원'
마음으로 거닐다…세계 최대 '사유의 정원'
가장 인상적인 공간 중 하나는 붓다의 ‘깨달음’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을 둘러싼 거울이 내 모습을 무한 반복해 비춘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는 불교 연기론을 시각화한 장치다. 바깥에는 곧게 뻗지 않고 끊임없이 휘감으며 올라가는 보랏빛의 등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모티브로 한 광장에는 12개의 대리석 조형물이 사방에 서 있다.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 조르바가 인생의 폐허 위에서 삶을 끌어안고 추는 춤을 형상화한 것이다. 땅에 박힌 기둥은 두 발, 옆으로 뻗은 구조물은 펼쳐진 두 팔이다. 가운데에는 사람 얼굴을 닮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표정이 모두 다르다. 이 공간의 이름은 ‘자유’다. 이 광장과 인접한 ‘미로’ 정원은 6개의 원이 겹쳐 만들어졌다. 안내판도, 화살표도 없다. 출입구는 네 곳이지만 어디로 들어가든 중앙의 소나무까지 가는 길은 모두 다르다. 각자의 길은 각자가 찾는 것이지, 똑같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정원으로 만나는 격동의 韓 역사

다시 정원 입구로 돌아와 오른쪽을 바라보면 ‘대한민국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 공간 ‘선비의 나라’ 입구에는 가지가 굵게 뻗은 반송 두 그루가 양팔을 벌린 듯 서 있다. 어머니의 품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 품 안에서 자란 아이가 입신양명해 길 끝에 도달하면 갓을 표현한 검은 원반의 구조물을 만나게 되는 서사다.

1592년 임진왜란을 형상화한 ‘불굴의 정신’ 공간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거북선이 있다. 거북선 주변에는 그라스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산들바람만 불어도 풀들이 일제히 흔들려 거센 파도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파도를 가르고 나아가는 거북선의 결연한 자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어지는 ‘고난의 시대’는 6·25전쟁의 참상을 형상화했다. 오엽송이 빽빽이 들어차 햇빛조차 들지 않고, 부러진 나무는 부러진 그대로, 죽은 나무는 죽은 그대로 방치돼 있다. 바닥의 돌은 거칠게 깎였고, 곳곳에 총탄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정원에서 보기 드문, 일부러 다듬지 않은 ‘아픈 풍경’이다.

‘산업화·민주화’ 구간을 지나면 ‘한강의 기적’이 펼쳐진다. 위에서 아래로 45m 길이의 수조에 물이 흘러내리고, 도시 빌딩 숲을 추상화한 검은 거울 구조물이 자기 자신을 비춘다. 마지막 ‘번영의 시대’ 언덕에는 잔디와 꽃으로 표현한 태극기의 건곤감리가 펼쳐진다.

맨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청록색의 거대한 위버하우스는 니체의 ‘위버멘슈’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정원을 한 차원 위에서 조망하는 자리다. 이곳에는 현대정원 개관과 함께 레스토랑이 문을 연다. 대한민국 요리 국가대표팀 코치 이동희 셰프가 이끄는 곳으로 정원에서 자란 식재료를 활용한 모던 한식을 즐길 수 있다.

메덩골정원은 하루 세 차례 도슨트 투어를 운영한다. 한국정원에선 매일 국악 공연이 펼쳐진다. 현대정원에서도 예술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현대정원 입장료는 성인 주중 5만원, 주말·공휴일 7만원,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양평=맹진규 기자 mae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