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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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 위기가 장기화하면서 전 세계에서 연료와 의료 용품, 생필품 사재기가 확산하고 있다. 공급 부족 우려가 실제 경제 충격으로 번지면서 각국 정부의 가격 통제와 시장 개입이 오히려 부족 현상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4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대치 상황이 석 달째 이어지면서 각국 정부가 사재기로 인한 공급 부족 악화를 막기 위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란 전쟁 여파로 해협이 폐쇄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자 한국에서는 플라스틱 쓰레기봉투 사재기가 벌어졌고, 호주에서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연료 저장용 제리캔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콘돔 부족 관련 게시물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확산했다.

기업들의 비축 경쟁도 심화하고 있다. 한국 경찰은 나프타 부족으로 의료 용품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자 주사기 사재기 의혹받는 기업들에 대한 단속에 착수했다. 인도에서는 한정 공급된 다이어트 코카콜라가 희소성을 얻으면서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이 유료 파티를 열 정도로 소비 열풍이 번지고 있다.

행동경제학 전문가들은 희소성에 대한 인식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더욱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컨설팅업체 비헤이비어럴 인사이트 팀의 엘리자베스 코스타 혁신·파트너십 총괄은 “사람들은 희소한 물건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며 “소셜미디어가 부족 현상에 대한 인식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상황은 코로나19 초기 화장지 사재기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에는 공포 심리가 만든 일시적 혼란 성격이 강했지만, 현재는 원유와 필수 원자재 부족 가능성이 현실화하고 있어 가계와 기업, 정부 모두 공급 중단 이전에 재고 확보에 나설 유인이 강하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소비자들의 비축 행동 자체는 자연스러운 시장 반응이라고 보고 있다. 중동 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충격 대응을 추적해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마우로 피수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자동차 연료를 미리 채우러 가는 것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사재기를 막기 위해 가격 통제에 나서기보다 가격 상승을 통해 수요를 줄이는 시장 메커니즘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 정책 방향은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OECD가 모니터링하는 50여개국 가운데 상당수는 연료세 인하나 직접적인 가격 통제를 통해 소비자 부담을 억제하고 있다. 피수는 이런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소비자 불만을 줄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공급 부족을 더 심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시장주의 성향의 영국 싱크탱크 경제문제연구소(IEA)의 줄리언 제솝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정부가 가격 억제 약속보다는 공급 안정 메시지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충분한 공급이 유지될 것”이라는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하며, 가격 상승 자체가 수요 억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국가는 공급 안정 조치에 나서고 있다. 호주는 지난주 국내 연료 비축 확대를 위해 100억달러 규모 패키지를 발표했고, 일본 총리는 석유화학 기업들에 연말까지 충분한 나프타 기반 제품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 기능만으로는 저소득층과 개발도상국의 필수재 접근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공급 부족이 발생할 경우 가격 급등으로 취약 계층이 시장에서 배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는 소비 억제를 위한 행동 유도 정책도 병행하고 있다. 호주는 2000만달러 규모 광고 캠페인을 통해 차량 트렁크를 비우고 타이어 공기압을 조정하며 루프랙을 제거해 연료 사용을 줄이자고 권고하고 있다. 네팔 국영 석유공사는 제한된 공급을 늘리기 위해 절반만 채운 가스통을 판매하고 있지만, 이에 따라 빈 용기 부족과 불법 재충전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가격 지원과 강제적 수요 절감을 결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공공정책연구소(IPPR)는 연료세 인하와 함께 속도 제한 강화 정책을 병행해 연료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급 부족이 더 확산할 경우 가격 통제와 배급제 도입 요구도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KPMG의 야엘 셀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상황은 단순한 시장 메커니즘을 넘어서는 문제”라며 코로나19 당시 각국이 개인보호장비(PPE)와 백신 확보 경쟁에 나섰던 사례를 언급했다. OECD의 피수는 결국 정부 간 협력을 통해 각국이 보유한 비축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