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장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주차금지 구역에 다양한 오브제를 둔 서울의 풍경이 신기했어요. 질서와 구분되는 일탈의 현장인데, 일본에서 그런 걸 본적 없는 제게 영감을 줬어요. 주차 금지 정물이 마치 기하학적 추상이나 조각처럼 느껴졌지요."

일본 작가 나카무라 마사토(63)는 13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로드무비: 1945년 이후 한·일미술>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사진 작업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일본의 현대미술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와 도쿄예대 동기로, 홍익대 유학 경험도 있는 그는 1989~1994년 서울 거리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이번 전시에 출품했다.

나카무라는 "일기예보 지도에도 늘 한국과 일본이 함께 그려지지 않느냐"며 "두 나라는 앞으로도 같은 기후와 같은 프레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카무라 마사토의 <한국과 일본>(1993). 작가 소장
나카무라 마사토의 <한국과 일본>(1993). 작가 소장
전시는 나카무라가 1990년대 한일 미술의 교류를 상징하기 훨씬 전부터, 한일 예술가들의 다양한 접점을 이야기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요코하마미술관이 공동기획한 이번 전시는 1945년을 기점으로 80년에 걸친 한일 현대미술교류의 역사를 작품과 아카이브를 통해 입체적으로 풀어냈다. 지난해부터 올해 3월까지 일본 요코하마미술관에서 먼저 열렸고 이후 규모를 확장해 과천관으로 옮겨왔다.

전시는 시대별로 다섯 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가장 먼저 재일조선인의 시선이 등장한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 활동을 이어간 재일조선인 미술가 가운데 리얼리즘 계열의 화가 조양규, 송영옥, 추상 실험을 전개한 곽인식 등 다양한 경향의 작가가 공존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본 미술계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 창고노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조양규의 작품 <밀폐된 창고>(1957)는 재일조선인들의 척박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조양규는 1960년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갔고 그 뒤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남긴 작품은 재일조선인이 일본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소외, 그리고 남북 분단이 개인의 삶과 예술에 남긴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위기가 반전된 두번째 섹션은 백남준과 일본 전위예술가들의 교류를 그렸다. 백남준이 일본 전위미술 그룹 '하이레드 센터'와 함께 한 개인 방공호 제작 퍼포먼스 '쉘터 계획을 위한 인체 전개도 사진'(1964)을 비롯해 구보다 시게코와 했던 다양한 작업이 소개됐다.
박서보 <유전질(遺傳質) 1-68>(19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서보 <유전질(遺傳質) 1-68>(196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세번째 섹션부터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본격화된 미술 교류를 조명한다.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한국현대회화전> 관련 자료와 함께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등의 작품도 만나볼수 있다. 박서보와 이우환의 교류, 명동화랑과 도쿄화랑을 중심으로 형성된 아티스트 네트워크도 함께 소개돼 눈길을 끈다.

이밖에도 일본 현대미술가들의 한국 참여가 본격화된 1970~80년대의 흐름도 담겼다. 1974년 시작돼 1979년까지 총 5회 열린 <대구현대미술제>와 1980년대 국제 교류의 장이었던 <국제임팩트아트페스티벌> 관련 자료들도 함께 소개됐다.
에비즈카 고이치 <조응-1977년 7월 대구의 여운>(2024), 개인 소장
에비즈카 고이치 <조응-1977년 7월 대구의 여운>(2024), 개인 소장
흥미로운 작품은 에비즈카 고이치의 '조응-1977년 7월 대구의 여운'이다. 흔한 한국의 방바닥이었던 누런색 장판에 따스함을 느낀 작가는, 차가운 철과 대비시켜 작품을 만들었다. 이밖에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후 열린 <서울아시아현대미술전> 아카이브는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교류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던 시기임을 설명한다.
이불 <사이보그 드로잉(레드 I)>(1996). 아라리오컬렉션
이불 <사이보그 드로잉(레드 I)>(1996). 아라리오컬렉션
네번째 섹션에선 1990년대 이후 양국 작가들의 작업이 이어진다. 앞서 설명한 나카무라 마사토의 서울 사진 연작과 함께 무라카미 다카시, 고낙범, 이불, 최정화 등 현재 관람객에게 익숙한 작가들의 작품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이불의 드로잉 47점은 일본 활동을 발판 삼아 국제 무대로 확장해가는 초기 작업 세계와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2000년대 이후 예술가들의 연대가 마지막 섹션으로 등장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공동체와 차별의 문제를 탐구한 다나카 고키의 '다치기 쉬운 역사들'(2018), 일본 사회가 겪은 재난의 현실을 다룬 정연두 작가의 '마술사와의 산책'(2014)이 대표적이다. 예술가들의 협업은 단순한 문화 교류를 넘어 사회적 연대 가능성으로까지 확장돼 여운을 남긴다.
정연두 <마술사와의 산책>(2014). 작가 소장
정연두 <마술사와의 산책>(2014). 작가 소장
전유신 학예연구사는 "로드무비라는 장르가 이동과 성장의 서사를 담고 있듯, 이번 전시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한일 예술가들의 만남과 교류를 따라가는 전시"라며 "양국 미술사의 새로운 사례들을 발굴했다는 점에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과천관 실내 전시실뿐 아니라 야외 조각공원까지 이어진다. 작은 공간에서 열렸던 요코하마 전시보다 작품 간 간격을 넓혀 관람 동선을 구성했다는 것이 국립현대미술관 측의 설명. <로드무비: 1945년 이후 한·일미술>은 오는 9월 7일까지 과천관에서 열린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