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급도 나이순?…'호봉제' 갇힌 한국, 임금 갈등만 커졌다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으로 달라며 파업을 예고한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내부적으로는 “같은 회사라도 보상이 달라야 한다”며 반도체(DS) 부문과 완제품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경험(DX) 부문이 ‘노노갈등’을 빚고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 성과급이 ‘직무·성과 보상’이 아니라 개인 기여도와 무관하게 지급하는 ‘집단 보상’에 가깝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다. 여러 사업부가 섞인 한국 대기업 특성상 이 같은 노노갈등은 계속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직무와 업무 강도, 책임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는 직무·성과급제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직무급제를 임금 삭감과 동일시하는 노조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정부가 성과급제, 직무급제 등 임금체계 개편을 장려하는 것과 반대로 근속 연수가 쌓일수록 임금이 오르는 연공급제(호봉제)를 채택하는 기업 비율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성과를 낸 만큼 성과급을 달라면서도 직무·성과급제에는 반대하는 일부 대기업 노조의 자가당착은 인공지능(AI) 시대에 굴뚝산업 시대 임금 기준을 적용하는 괴리가 빚어낸 부작용이다. 임금과 성과 보상 기준의 답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법정 정년 연장이 현실화하면 청년층 고용 위기와 노동시장 이중 구조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인재 유입 막는 호봉제


10일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이 고용노동부에서 받은 ‘2025년 임금체계 현황’에 따르면 1인 이상 전체 사업체 중 호봉제 운영 비중은 13.1%로 전년(12.8%) 대비 0.3%포인트 상승했다. 2016년 21.7%에서 2022년 13.7%로 떨어진 호봉제 비중은 2024년 반등한 뒤 2025년까지 2년 연속 상승했다.

고도 성장기 시대에 호봉제는 근로자의 장기 근속을 유도함으로써 인재를 확보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저성장·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건비 부담이 생산성을 뛰어넘자 호봉제는 인재 유입을 가로막고 기업 경쟁력을 깎아먹는 주범이란 비판을 받는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에게 혜택이 집중되기 때문에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심화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임금 불공정’에 미치는 요인과 영향을 분석한 결과 한국은 ‘근속기간’의 영향이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주요 6개국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반면 ‘직업’이 끼치는 영향은 가장 낮았다.

호봉제 대안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임금체계가 직무·성과급제다. 정부와 경영계는 1990년대부터 직무·직능급 확산을 추진해왔지만 답보 상태다. 지난해 300인 이상 대기업 중 직무급을 도입한 사업장 비중은 31.9%로 전년(32.4%) 대비 되레 낮아졌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해 8월 “직무급 도입 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어렵다”고 밝혔다. 노동계에서는 직무급 도입을 ‘임금 삭감’과 동일시하는 인식이 뿌리 깊어 맹렬히 반발하고 있다.

◇임금체계 개편 ‘마지막 골든타임’


정부가 정년 연장을 추진하는 현시점은 임금체계 개편의 마지막 ‘골든타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호봉제를 유지한 채 정년만 늘어나면 기업은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신규 채용을 축소할 가능성이 크다. 2016년 정년을 60세로 연장한 이후 1000명 이상 대기업에서 청년 고용이 11.6% 감소했다. 청년층 취업난이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임금체계 개편 없는 정년 연장은 2016년의 재앙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임금체계 개편을 가로막는 법적 제약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려면 근로자 과반 또는 노조 동의를 요구한다. 호봉제 혜택이 큰 대기업일수록 임금체계 개편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수영 고려대 특임교수는 “호봉 상한선(cap)을 설정해 임금 상승폭을 조절하고, 그 여유분 내에서 기업 상황에 맞게 성과급이나 직무급으로 점진적으로 전환하는 방식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말했다.

日은 '역할+직무급' 복합형 임금체계 확산

직무급제 전면 도입보다 호봉제(연공급)를 단계적으로 완화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직무급과 호봉제의 중간 성격인 직능급, 역할급 등을 거치며 연착륙한 일본 사례를 참고해 ‘한국형 임금체계 개편안’을 설계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호봉제의 뿌리는 일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시 경제 체제와 전후 산업 재건 과정을 거치면서 호봉제는 근로자 ‘생활 보장’과 ‘숙련 직원 유지’의 핵심 장치로 기능했다. 일본에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도 고도 성장기 호봉제가 주요 임금체계로 자리 잡았다.

일본 재계는 1960년대 들어 국제 경쟁력 향상, 생산성 개선 등을 위해 직무급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순환 보직 중심인 데다 직무 경계가 느슨한 일본식 조직 문화와 충돌해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중간 다리로 근로자 개인의 숙련도와 업무 능력에 따라 임금을 결정하는 직능급 확산으로 방향을 바꿨다. 직능급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다시 호봉제화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후 일본 기업은 직능급보다 성과급 성격을 더 강화한 역할급 도입에 나섰다. 책임과 권한, 성과 수준에 따라 임금을 책정하는 역할급은 일본에서 연공급, 직능급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제3의 길’로 불린다. 직무급을 전면 도입하는 대신 호봉제와 역할급을 혼합한 ‘병존형’ 임금체계를 택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글로벌 첨단소재 기업 도레이다. 이 회사는 1991년 기존 연공급 체계를 ‘기초급, 자격급, 성적급’으로 분리하고 근속연수에 따라 자동으로 인상되는 기초급 대상은 54세까지로 제한했다. 2004년에는 호봉 승급 대상을 35세로 낮추고 자격급과 성적급을 더 강화했다.

인사관리(HR) 전문가인 신재욱 에프엠어소시에이츠 대표는 “일본은 직무급으로 가는 과정에서 연공급에 역할급을 함께 운영하는 병존형 임금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며 “도레이처럼 특정 연령까지 연공급을 유지하되 이후부터 역할과 직무 비중을 높이는 임금 구조가 대표적”이라고 했다.

일본생산성본부에 따르면 비관리직 기준으로 호봉제 비중은 1999년 78.2%에서 2018년 57.8%로 떨어졌다. 관리직군에서는 2018년 기준 26.7%에 그쳤다. 신 대표는 “한국은 임금체계가 아예 없는 기업이 63%에 달한다”며 “호봉제에서 바로 직무급제로 건너뛰기보다 병행적 임금체계를 통한 연착륙이 현실적”이라고 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