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Museum SAN)에서 열린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뵈브 클리코와 패션 브랜드 자크뮈스의 협업 행사 현장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Museum SAN)에서 열린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뵈브 클리코와 패션 브랜드 자크뮈스의 협업 행사 현장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지난 4월 1일 강원도 원주, 안도 타다오(Tadao Ando)가 설계한 뮤지엄 산(SAN)의 견고한 콘크리트 위로 선명한 노란색이 번졌다. 이는 단순한 프랑스 패션 브랜드의 상륙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유럽의 유산이, 가장 빠르게 변하는 도시의 감각과 충돌하며 만들어낸 하나의 장면이었다. 왜 이들은 파리나 뉴욕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서울’을 선택했을까?

샹파뉴의 깊은 셀러에서 수십 년을 머물던 액체가 이 도시로 호출된다. 느리게 축적된 시간이 빠르게 소비되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장면. 오늘날 럭셔리 산업은 더 이상 시간을 쌓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시간을 ‘지금’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패션은 ‘지금’을 다루는 산업이다. 계절과 트렌드 속에서 가장 빠르게 반응하고 사라진다. 반면 샴페인은 ‘축적된 시간’을 판다. 긴 숙성과 기다림을 통해 가치를 얻는다. 이 정반대의 시간 구조가 만날 때, 흥미로운 교환이 일어난다. 술은 현재성을 얻고, 패션은 지속성을 획득한다.

감각의 전이: 가족의 서사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최근 주류와 패션의 만남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자크뮈스(Jacquemus)와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의 협업이다. 디자이너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Simon Porte Jacquemus)의 세계는 여성에 대한 경의에서 출발한다. 할머니의 옷차림과 남프랑스의 자연을 모티프로 한 그의 패션은 차가운 사치품이 아닌 ‘가족의 서사’를 담는다. 여기에 제니(JENNIE)라는 동시대의 아이콘이 더해지며, 과거의 기억은 지금의 언어로 번역된다.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뵈브 클리코와 패션 브랜드 자크뮈스의 협업 행사에 참여한 제니 / 사진출처. JACQUEMUS 공식 페이스북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뵈브 클리코와 패션 브랜드 자크뮈스의 협업 행사에 참여한 제니 / 사진출처. JACQUEMUS 공식 페이스북
흥미로운 점은 이 샴페인 하우스 역시 한 여성의 이름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마담 클리코(Barbe-Nicole Clicquot Ponsardin)는 ‘미망인’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이어가며 샴페인의 방식을 바꿨다. 투명한 와인을 완성하기 위한 리들링의 혁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녀가 남긴 방식은 오늘날 셀러 마스터로 활동하는 이들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한 개인의 선택은 결국 하나의 시간으로 남는다. 샴페인을 비롯한 술의 세계에서 이름을 남긴 여성들은 제약 속에서 시간을 견디며 의미를 축적해왔다. 이 장면은 색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한 이야기의 공명이다.

깊이의 술과 속도의 패션이 만날 때

전통을 파는 브랜드에게 서울은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운 시험대다. 이곳에서는 트렌드의 유통기한이 짧고 ‘지금’의 감각이 빠르게 교체된다. 숙성의 깊이는 이 도시에서 속도의 언어로 번역된다.

이러한 협업은 단순한 이미지 전략이 아니다. 감각을 번역하는 방식에 가깝다. 색과 질감은 맛과 향을 대신하고, 공간은 경험을 확장한다. 우리는 더 이상 술의 풍미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특정한 색과 장면, 그리고 그 안에 있었던 자신을 함께 기억한다. 소비의 중심이 제품에서 경험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의 사인이 새겨진 'La Grande Dame 2018'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의 사인이 새겨진 'La Grande Dame 2018'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다만 이 과정이 언제나 깊이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은 때로 더 빠르게 소비되기 위해 호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은 샴페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스키를 비롯한 다른 주류에서도 패션과의 협업을 통해 시간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협업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다.

이 변화는 공간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뮤지엄 산의 정적은 오래된 시간의 밀도를 상징한다. 반면 도산공원의 팝업 공간은 그 시간을 해방시킨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장면 속에 들어가 경험한다. 럭셔리는 소유의 대상에서, 공유되는 순간으로 이동한다.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 × Veuve Clicquot 협업 'La Grande Dame 2018'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 × Veuve Clicquot 협업 'La Grande Dame 2018'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우리는 결국 누구의 이야기를 마시는가

지하 셀러에서 수십 년을 견디며 가치를 더하는 술은 ‘축적된 시간’을 판다. 반면 패션은 지금 가장 빛나야 하는 ‘휘발되는 시간’을 판다. 이 두 시간이 교차하는 순간, 술은 박제된 과거에서 현재의 감각으로 해방된다.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 × Veuve Clicquot 협업 'La Grande Dame 2018'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 × Veuve Clicquot 협업 'La Grande Dame 2018' / 사진.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패션이 ‘지금’의 공기를 옷감에 새긴다면, 샴페인은 ‘지나온 계절’을 기포 속에 담는다. 서로 다른 시간이 한 장면 안에서 겹쳐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입체적인 시간을 경험한다. 그 장면 속에는 이름을 남긴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마시는 이 한 잔은, 과연 누구의 시간을 번역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