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라치를 피해 배를 가렸던 그레이스 켈리의 '켈리백', 코르셋을 벗어던진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 우리는 흔히 프랑스의 럭셔리를 디자이너 개인의 천재성이나 우연한 드라마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드라마 뒤에는 수백 년간 정교하게 설계된 '품격의 시스템'이 버티고 있다.

프랑스의 럭셔리는 특정 도시의 스타일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국가가 어떻게 디자인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탈리아 럭셔리가 도시마다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면, 프랑스는 궁정과 국가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심은 세련미의 씨앗이 루이 14세의 절대권력을 만나 '국가 전략'으로 꽃피우기까지, 프랑스가 전 세계 취향의 기준을 독점하게 된 비밀은 시대의 흐름 속에 스며 있다.

베르사유, 생활이 품격이 되다

첫 유럽 여행 코스에서 파리는 빠질 수 없고, 베르사유 궁전은 당연한 필수 코스다. 하지만 파리를 여러 번 찾았음에도 베르사유에 가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을 건립한 루이 14세가 왜 파리를 두고 굳이 이 외진 곳에 궁전을 지었는지, 왜 귀족들을 모두 이곳에 불러 모아 함께 살게 했는지 그 때는 그 의미를 몰랐으니까. 그 화려함은 사실은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 초상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생활양식을 프랑스 궁정에 도입한 인물이다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 초상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생활양식을 프랑스 궁정에 도입한 인물이다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1533년,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왕비로 맞이했다. 이 결혼은 정치적 동맹이었지만, 프랑스 생활양식을 바꾸는 시작이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은 여전히 손으로 식사를 했다. 개인 식기나 정제된 식사 예법이 자리 잡지 않은 상태였다. 카트린은 피렌체에서 익힌 르네상스의 세련된 감각과 생활양식을 가져와 궁정 문화를 바꿨다.

그녀와 함께 온 이탈리아 요리사들은 변화를 빠르게 확산시켰다. 포크와 은식기가 도입되며 식사 예법이 자리 잡았고, 향신료와 설탕을 활용한 디저트는 연회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복식 역시 변했다. 드레스와 코르셋은 여성의 실루엣을 변화시켰다.

카트린의 영향력은 향수 문화에서도 드러난다. 피렌체에서 시작된 조향 기술은 프랑스 궁정으로 유입되며 새로운 향 문화를 만들었다. 향수는 체취를 가리는 용도를 넘어, 교양과 취향을 드러내는 요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향수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해 갔다.

17세기에는 남프랑스 그라스 지방이 향료 산업과 결합하며 향수 생산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프랑스는 점차 향수 문화의 기준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카트린의 등장은 프랑스를 생활 양식의 중심지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 세기 뒤, 루이 14세에 의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확장된다.

당시 왕실은 파리의 루브르와 튈르리 궁전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도, 퐁텐블로와 같은 외곽의 왕궁을 오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귀족들 역시 각자의 영지에서 권력을 유지하던 봉건 사회였고, 왕이 이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1682년, 루이 14세는 파리를 떠나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겼다. 왕가만의 이사가 아니었다. 귀족들 역시 베르사유에 상주해야 했고, 이는 왕이 프랑스 귀족 전체를 자신의 권력 아래 두기 위한 전략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루이 14세가 궁정을 통해 귀족과 권력을 통제한 공간이다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루이 14세가 궁정을 통해 귀족과 권력을 통제한 공간이다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대표적인 것이 왕의 기상과 취침을 지켜보는 ‘레베(Lever)’ 의식이었다. 어떤 귀족이 왕의 침실에 입장할 수 있는지가 곧 정치적 위상이었고, 이 의례는 궁정 내 위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베르사유의 일상은 끊임없는 연회와 의례로 이어졌다. 귀족들은 왕의 기상과 취침, 식사와 산책에 이르기까지 정해진 시간과 형식에 따라 참여해야 했고, 그때마다 정해진 복식과 예절이 있었다.

옷차림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궁정이 요구하는 규칙이었고, 장인들은 이러한 기준에 맞춰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또한 루이 14세는 예술가와 장인을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후원했다. 장 밥티스트 콜베르 재무장관은 장인들을 파리와 베르사유로 불러 모아 왕립 아카데미에 소속시켰다. 건축가와 조경가, 화가들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했다.

궁정 장식과 미술, 정원의 설계까지 모든 과정이 국가의 기획 아래 이루어진 셈이다. 이 시기 공예와 디자인은 개인의 수공업을 넘어 국가 전략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훗날 ‘메이드 인 프랑스’로 이어지는 기반이 됐다.

파리, 소비가 문화가 되다

파리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예술과 미식, 그리고 스타일이다. 그 중 봉 마르셰는 단순한 백화점이 아니라 오래된 파리의 감각이 남아있는 곳이다. 소비라는 행위가 처음으로 문화가 된 곳이기 때문일까. 봉 마르셰에 처음 들어섰을 때, 공간 자체가 하나의 경험처럼 느껴졌다.
봉 마르셰, 1875 소비가 ‘경험’이 된 최초의 공간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봉 마르셰, 1875 소비가 ‘경험’이 된 최초의 공간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베르사유가 귀족의 공간이었다면, 19세기 파리는 부르주아의 도시가 됐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프랑스로 확산하며 상품의 생산과 유통이 빨라졌고, 파리는 이를 소비하고 경험하는 중심지로 변해갔다. 1850년대 초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은 오스만 남작은 좁은 골목을 허물고, 직선으로 뻗은 대로와 웅장한 건축물을 세우며 오늘날의 파리로 바꾸었다. 새로운 파리는 소비와 시각적 경험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며 ‘근대적 럭셔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샤를 마르빌이 기록한 오스만 파리 대로, 19세기 중반 도시 개조를 통해 이동과 소비가 가능해진 근대 도시의 모습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샤를 마르빌이 기록한 오스만 파리 대로, 19세기 중반 도시 개조를 통해 이동과 소비가 가능해진 근대 도시의 모습 / 사진출처. Wikimedia Commons
1852년, 파리에 열린 새로운 공간이 바로 근대적 백화점의 시작을 알린 봉 마르셰였다. 철골 구조와 넓은 천창, 그리고 여러 층을 연결하는 발코니 구조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개방형 공간을 구현했다. 이전까지의 상점은 직원에게 요청해야만 상품을 볼 수 있는 폐쇄적 구조였다.

봉 마르셰는 이를 완전히 바꿨다. 상품을 진열해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도록 하고, 가격을 고정해 비교와 선택이 가능하게 했다. 쇼핑은 더 이상 단순한 구매가 아니라, ‘보는 경험’이자 하나의 문화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귀족뿐 아니라 신흥 부르주아까지 같은 공간에서 소비를 공유하게 되면서, 백화점은 도시 안에서 새로운 소비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소비 방식이 바뀌면서, 패션 역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858년,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 찰스 프레데릭 워스는 파리에 자신의 하우스를 열고 고객을 위한 맞춤 드레스를 제작했다. 그는 옷 안쪽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라벨의 기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고객을 위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이 방식을 꾸뛰르(Couture)라 부른다. 옷은 이름 없는 장인의 작업물에서 창작자의 개성과 철학이 담긴 예술적 표현이 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파리 오뜨 꾸뛰르 패션위크로 이어지고 있다.
겔랑 첫 부티크, 1828 향수는 이곳에서 하나의 취향이자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 사진출처. 겔랑 홈페이지
겔랑 첫 부티크, 1828 향수는 이곳에서 하나의 취향이자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 사진출처. 겔랑 홈페이지
프랑스 럭셔리 하우스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파리에서 탄생했다. 1828년 향수 하우스로 문을 연 겔랑은 황실에 납품하며 프랑스 향수의 기준을 세웠다. 에르메스는 1837년 마구 제작 공방으로 시작해, 귀족의 승마 문화와 연결된 가죽 공예를 가방과 패션으로 확장했다. 그레이스 켈리가 파파라치를 피해 핸드백으로 배를 가리던 사진 한 장이 에르메스를 전설로 만들었다. 켈리백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1847년 문을 연 까르띠에는 주얼리 하우스로 성장하며 ‘왕의 보석상’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1854년 루이 비통은 여행용 트렁크 제작에서 출발해 이동의 방식을 바꿨다.
까르띠에 팬더 클립 브로치, 1949 ‘왕의 보석상’이라 불리며 권력과 미학을 상징한 메종 / 사진출처. 까르띠에 홈페이지
까르띠에 팬더 클립 브로치, 1949 ‘왕의 보석상’이라 불리며 권력과 미학을 상징한 메종 / 사진출처. 까르띠에 홈페이지
20세기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반클리프 아펠은 1906년 파리 방돔 광장에서 출발해 하이 주얼리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샤넬은 1910년 파리 깡봉 거리에서 시작해 코르셋 중심의 복식을 해체하며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다. 코코 샤넬은 “여성을 장식에서 해방시켰다”는 말을 남겼다. 리틀 블랙 드레스 하나가 귀족 여성의 화려한 드레스 문화를 만들었다.

크리스찬 디올은 전후 ‘뉴 룩(New Look)’을 통해 다시 한번 파리를 세계 패션의 중심으로 복원했다. 1947년 첫 컬렉션에서 가는 허리와 풍성한 스커트를 선보인 순간,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파리의 우아함이 다시 태어났다는 평이 쏟아졌다. 19세기에 형성된 토양 위에서, 20세기의 메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확장해 나갔다.
[좌] 샤넬 블랙 드레스, 1927 장식에서 해방된 여성의 새로운 실루엣  [우] 크리스찬 디올 바 슈트, 1947 전후 파리의 우아함을 다시 정의한 실루엣 / 사진출처. MET 홈페이지
[좌] 샤넬 블랙 드레스, 1927 장식에서 해방된 여성의 새로운 실루엣 [우] 크리스찬 디올 바 슈트, 1947 전후 파리의 우아함을 다시 정의한 실루엣 / 사진출처. MET 홈페이지
귀족의 후원 대신 도시의 소비자를 만나면서, 장인들은 단순한 상점을 넘어 철학과 스타일을 가진 ‘메종(Maison)’으로 진화했다. 백화점, 꾸뛰르, 메종. 19세기 파리가 만든 이 세 가지는 오늘날까지 럭셔리 산업을 규정하는 핵심 구조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국가가 브랜드가 되다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에서 일하면서 느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제품을 설명하기 전에, 그 브랜드가 어디서 시작됐고 무엇을 지켜왔으며, 왜 그것이어야 하는지를 먼저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방식은 다른 나라 브랜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프랑스는 달랐다. 그 이야기가 국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해온 하나의 기준 안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출발을 이해하게 된 건 이후 미술사와 문화를 공부하면서였다.

그 흐름은 20세기에 들어 국가 전략의 형태로 다시 정리된다. 20세기 중반,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은 새로운 회복의 길을 찾아야 했다. 프랑스 럭셔리 역시 위기에 직면했다. 오랜 전통은 있었지만, 세계 시장을 상대로 경쟁하기에는 구조적 기반이 약했다. 이때 다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루이 14세 시대의 재무장관 장 밥티스트 콜베르이다. 그는 베르사유 시절부터 ‘예술과 산업은 국가의 힘’이라고 강조했으며, 그 사상은 1954년 럭셔리 업계가 공동 조직한 ‘콜베르 위원회(Comité Colbert)’를 통해 되살아났다.
콜베르 위원회, 프랑스 럭셔리를 하나의 기준으로 묶는 현대적 시스템
콜베르 위원회, 프랑스 럭셔리를 하나의 기준으로 묶는 현대적 시스템
콜베르 위원회는 프랑스 럭셔리 하우스들이 공동으로 결성한 산업 협의체다. 겔랑의 장 자크 겔랑이 주도한 이 연합체는 향수, 주얼리, 패션, 와인, 크리스털 등 분야는 달랐지만 모두가 ‘프랑스가 곧 품격의 표준’이라는 메시지를 공유했다. 샤넬, 에르메스, 까르띠에 같은 대표 메종들이 ‘프랑스 럭셔리’라는 이름 아래 함께 제시되며 오뜨 꾸뛰르, 가죽 공예, 하이 주얼리의 정수를 하나의 문화로 보여줬다.

여기에 돔 페리뇽 같은 샴페인 메종과 파리 리츠, 르 브리스톨 같은 럭셔리 호텔까지 더해지며 패션과 보석을 넘어 와인, 미식, 그리고 머무는 경험까지 프랑스적 생활 양식 전체를 하나로 연결했다. 오늘날 100여 개 메종과 문화기관이 참여하며 파리 오페라극장이나 루브르 박물관과의 문화 협력도 이어지고 있다. 이 연합은 해외 전시와 문화예술 협력을 주도하며 브랜드 외교 기능을 수행한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가져온 생활양식, 루이 14세가 구축한 궁정의 질서, 19세기 파리가 만든 소비의 구조, 그리고 콜베르 위원회를 통해 완성된 국가적 시스템. 이 모든 것이 서로 이어지며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이탈리아가 도시의 다양성에서 럭셔리를 만들어냈다면, 프랑스의 럭셔리는 국가가 만든 질서와 품격의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