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연합뉴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연합뉴스
국토교통부가 최근 지역주택조합(이하 지주택)의 제도개선방안을 발표하면서 지주택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2일 업무대행사가 제기한 안양지역주택조합과의 사건에서 지주택 사업의 투명성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계약서의 문구'보다 '정직한 신뢰'가 법정에서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보여주는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지주택 사업에서 업무대행사는 조합의 손과 발이 되는 핵심 파트너지만 때로는 조합원들의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위험한 동거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한 조합이 업무대행사의 비위 의혹을 이유로 계약 해지를 통보하자, 업무대행사가 업무대행자 지위 확인과 업무대행 수수료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시작됐습니다.

업무대행 계약서에는 해지사유를 제한하는 약정이 있었고 1심 법원은 철저하게 '계약 문언'에 집중했습니다. 즉 1심은 '당사자가 해지 사유를 한정했다면 그 내용과 절차를 따르지 않은 해지는 무효'라며 업무대행사의 손을 들어줬고 조합은 원치 않는 대행사와 사업을 끝까지 함께하며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해야 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2심에서 분위기가 급반전됐습니다. 조합 측의 끈질긴 추적 끝에 업무대행사가 홍보관 공사비를 부풀려 시공업체로부터 9000만원의 뒷돈을 받은 범죄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2심 소송 중 별도의 형사고소 사건에서 업무대행사 간부가 기소 의견으로 송치됐습니다.

2심 재판부는 이 지점에서 계약서의 문구를 뛰어넘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지주택 사업은 조합원들의 소중한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고도의 신뢰 사업'인데, 대행사가 뒷돈을 챙긴 것은 계약의 기초를 흔들어버린 행위라고 본 것입니다. 비록 계약서에 '리베이트'가 명시적 해지 사유로 적혀 있지 않더라도, 계약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신뢰가 파탄 났다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법리를 적용해 1심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이 정당하다고 최종 확정했습니다. 대법원은 특히 주택법 제11조의2 제5항이 규정한 업무대행자의 신의성실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업무대행사는 조합원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데, 사익을 위해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면 계약의 효력은 상실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로써 대행사가 그토록 믿은 '철벽 계약서'는 신뢰 파탄이라는 화살에 뚫리고 말았습니다.

이번 판결로 피고 조합이 얻은 실익은 단순한 승소 그 이상입니다. 대행사는 준공 및 청산 시점에 추가 수수료를 청구할 계획이었으나, 판결 확정으로 잔여 수수료를 청구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법원은 대행사의 기성고를 80%로 제한하며 조합의 재정 부담을 덜어줬습니다. 또한 대행사는 내용증명 등을 통해 제3의 업체 선정을 방해하는 등 '알박기'식 행태를 보였으나, 조합은 법적 장애물 없이 독자적으로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경영권을 회복했습니다. 나아가 대행사의 비위가 판결을 통해 확정되면서 조합이 별도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습니다.

이번 판결은 업무대행사가 조합 일부와 결탁해 그동안 유리한 계약 조항을 방패 삼아 각종 이권 사업을 차지하고 조합을 좌지우지하던 구태의연한 관행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결국, 지역주택조합 사업의 성공은 화려한 조감도가 아니라 '신의와 성실'의 바탕 위에서 결정됩니다. 법은 배신한 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의 교훈은 전국의 수많은 지주택 사업장에 유용한 법적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국토교통부의 제도개선방안 발표를 계기로 지역주택사업의 활성화를 기대해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조선규 법무법인 조율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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