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정원에서 자란 소년, 여성 패션의 역사를 바꾸다 [민은미의 명품 스토리텔러]
노르망디 장미정원서 시작된 '디올'
정원과 꽃의 기억으로 채워진 시간
정치학 전공…예술을 선택한 갤러리스트
전쟁의 흔적을 지워낸 ‘뉴 룩’의 탄생
정원과 꽃의 기억으로 채워진 시간
정치학 전공…예술을 선택한 갤러리스트
전쟁의 흔적을 지워낸 ‘뉴 룩’의 탄생
노르망디의 여러 별장과 저택 중 가장 유명한 집 중 하나가 ‘빌라 레 룸브’였다. 이 저택이 특별한 이유는 건물보다 정원 때문이었다. 정원 가꾸기를 매우 사랑했던 안주인 덕에 집 주변은 장미와 다양한 꽃들로 가득 채워졌고 절벽 위에 자리한 정원에는 바다와 꽃이 함께 보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향도 달라졌다. 1905년에 태어나 바로 이 저택에서 성장한 어린 소년은 정원을 거닐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의 곡선과 색채를 바라보곤 했다. 그 소년이 훗날 ‘뉴 룩(New Look)’으로 패션의 역사를 바꾼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이다.
정치학과 출신…파리의 갤러리스트
청년 시절의 디올이 걸어온 길은 패션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료 회사를 운영하며 큰 부를 이룬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를 갖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디올은 명문인 파리 정치대학에 진학해 정치학을 공부했다. 부모님은 그가 외교관이나 공직자의 길을 걷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디올의 관심은 늘 강의실 밖의 세계에 더 가까이 있었다.
시련과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으로 여유로운 삶을 누리던 디올에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시련이 찾아왔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파리의 예술계까지 흔들었고, 그가 열었던 갤러리 역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가족 사업의 파산과 어머니의 죽음까지 겹치면서, 그는 안정된 기반을 잃게 되었다. 한때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적 취향을 키우던 청년은 이제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 그를 패션의 세계로 이끌었다. 디올은 쿠튀리에 로베르 피게의 하우스에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루시앙 를롱의 아틀리에에서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장미 정원에서 길러진 감각과 갤러리에서 다져진 예술적 안목은, 이제 종이 위의 스케치를 넘어 현실의 드레스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뉴 룩'의 탄생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패션의 형태까지 바꾸어 놓았다. 크리스찬 디올도 전쟁에 소집되었다가 파리로 돌아와 다시 패션계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전쟁 기간 유럽 사회는 극심한 물자 부족을 겪었고, 남성들이 전쟁터로 떠난 사이, 여성들은 그 자리를 대신해 사회적인 역할을 해야 했다. 의복 역시 생존을 위한 실용성과 절약이 우선이었고, 장식이 배제된 기능적인 옷들이 일상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회 분위기는 암울했다. 패션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그 흐름을 단숨에 뒤집은 것이 바로 1947년, 디올의 첫 컬렉션이었다. 잘록하게 조여진 허리, 풍성하게 퍼지는 스커트, 부드럽게 흐르는 곡선의 실루엣. 전쟁의 흔적을 지워내듯 등장한 이 스타일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를 본 패션 에디터 카멜 스노는 “완전히 새로운 룩이다”라고 경탄했고, 그 순간부터 이 스타일은 ‘뉴 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뉴 룩의 의미는 전쟁 이후 억눌려 있던 감정에 대한 해방이었고, 다시 아름다움을 꿈꾸기 시작한 시대의 선언이었다. 다시 우아함과 여성성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였다.
장미 정원에서 자란 소년이 새긴 이름
노르망디의 저택은 오늘날 크리스찬 디올 뮤지엄(Christian Dior Museum)으로 남아 있다. 바다와 정원을 마주한 그 집을 바라보면, 한 소년의 섬세한 감각이 어떻게 세계 패션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자라났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디올은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을 정원과 꽃의 기억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꽃잎처럼 부드럽게 퍼지는 스커트, 잘록한 허리를 중심으로 피어나는 실루엣, 그리고 여성성을 찬미하는 디자인. 훗날 패션 역사에 남는 그의 스타일은 어쩌면 이미 노르망디의 장미 정원에서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