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주자(Accompanist)라는 단어가 국내에서 눈에 띄게 줄었다.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평가절하하는 용어라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일 테다. 요새 ‘듀오 리사이틀’이라는 표현이 이중주 형태의 기악 독주회에서 부쩍 선호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피아노가 다른 한쪽과 동등한 관계임을 공연명에서부터 드러내려는 의도다.
그런데 성악 공연의 경우에는 양상이 다르다. ‘반주’와 같은 표현이 여전히 널리 쓰일 뿐 아니라 전문 반주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많다. 흥미로운 부분은, 성악계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피아니스트의 역할을 마냥 얕잡아보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악 반주, 가곡 반주가 고유한 분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헬무트 도이치나 줄리어스 드레이크와 같은 ‘반주 스페셜리스트’들을 폄하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이렇듯 성악계에서, 특히 가곡 분야에서 피아노 연주가 독자적인 위상을 갖게 된 데는 ‘반주의 거장’으로 불렸던 제럴드 무어(Gerald Moore, 1899~1987)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독일 예술가곡의 상징적 존재였던 바리톤인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 1925~2012)가 그의 단짝이었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 / 사진. ⓒDG Archive건반에 그림자는 없다
무어는 그의 회고집 서문에서 자신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테너 존 코츠(John Coates)와 피셔-디스카우를 들었다. 경력 초기에 파트너십을 이루었던 코츠가 무어에게 ‘동등한 파트너’라는 방향성을 심어주었다면, 피셔-디스카우는 무어 경력의 전성기와 마지막을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1951년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무어는 50대, 피셔-디스카우는 20대였다. 당시 무어와 무대를 함께하는 것이 가수로서 ‘잘나간다’는 징표로 인식되었다고 하니, 무어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만하다. 그에 비하면 20대의 피셔-디스카우는 막 등장한 풋내기였던 셈이다. EMI의 거물 프로듀서 월터 레그(Walter Legge)가 무어와 독일의 유망주를 이어주었다. 녹음할 작품은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무어는 “한 소절만 듣자마자 대가가 앞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이 자리를 회고했다. 20여 년에 걸친 협업의 시작이었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 / 사진. ⓒEllinger
피셔-디스카우는 무어의 반주 지침서 『The Unashamed Accompanist』(1943)의 독일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건반 위의 창백한 그림자는 더 이상 없다.” 무어가 경력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피아니스트는 성악 공연에서 대개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됐다. 성악 앨범에 피아니스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였다. 베이스 알렉산더 키프니스는 무어의 이름이 자신의 앨범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품위가 손상되었다고 여겨 화를 냈다고 한다. 무어가 1962년 낸 회고록의 제목 『Am I Too Loud?』는 이러한 고루한 인식을 비꼬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무어가 피아니스트의 몫을 밀어붙이는 외골수였던 것은 아니다. 피셔-디스카우는 그의 회고록 『Nachklang』(1988)에서 무어를 “내가 만난 이 중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세계 최정상 가수들이 앞다투어 무어를 찾았던 것은 그의 연주가 뛰어나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수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능력이 무어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피셔-디스카우 역시 선배들과는 다른 부류였다. 무어는 피셔-디스카우가 리허설에서 자신의 조언을 자주 구했으며, 그것을 무겁게 인식했다고 이야기했다. 무어의 표현에 따르면 피셔-디스카우가 “프리마돈나가 아닌 예술가이기 때문”이었다.
무어는 1967년 고별 무대를 끝으로 공연에서 은퇴했다. 이 공연의 실황 녹음이 <Tribute to Gerald Moore>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어 있다. 피셔-디스카우와 더불어 무어와 긴밀한 협업을 이어왔던 두 최정상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와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Victoria de los Ángeles)가 무대를 함께했다. 당대를 대표하는 세 가수가 ‘반주자를 위한’ 공연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반주에 평생을 바쳐온 무어였으나, 마무리만큼은 독주가 장식했다. 피아노 독주로 편곡한 슈베르트의 ‘음악에게(An die Musik)’. 들을 때마다 숙연해지는 녹음이다.
[제럴드 무어가 고별 공연에서 연주한 슈베르트 ‘음악에게’(1967)]
독일 예술가곡의 전범
피셔-디스카우와 무어는 각자 대단히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했지만, 이들의 본령은 역시 독일 낭만주의 가곡이었다. 무어는 피셔-디스카우가 “슈베르트, 슈만, 볼프, 브람스의 심장으로 나를 누구보다 깊이 데려가 주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레코딩 산업의 황금기와 음악가로서의 전성기가 맞물린 덕분에, 두 사람의 활약은 엄청난 양의 녹음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무어는 그중에서도 슈베르트 가곡 프로젝트를 반세기에 걸친 그의 녹음 활동 중 가장 큰 기쁨을 준 작업으로 꼽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3년까지 여성을 위한 작품을 제외한 슈베르트의 모든 가곡을 녹음한 대형 기획이었다(고별 공연 이후 무어가 녹음을 함께한 가수는 피셔-디스카우와 자넷 베이커뿐이었다). 마치 든든한 사전처럼, 피셔-디스카우와 무어의 녹음은 슈베르트 가곡이라면 어느 곡이건 믿을 수 있는 선택지가 된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 / 사진. ⓒDavid Farrell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들의 녹음은 슈베르트의 ‘3대 연가곡’, 그중에서도 ‘겨울 나그네’일 것이다. 두 사람은 이 작품을 스튜디오에서만 세 번 녹음했는데, 특히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된 1971년 녹음은 ‘겨울 나그네’의 클래식으로 오랜 세월 사랑받아 왔다. 슈베르트를 대표하는 연가곡인 만큼 명연이 많지만, 피셔-디스카우의 지적이면서도 온화한 해석, 갈색빛의 부드럽고 품위 있는 음색은 오늘날에도 하나의 기준으로서 위상을 지키고 있다.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중 5곡 ‘보리수’(1971)]
무어의 타계 후 피셔-디스카우와 파트너십을 이루었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피셔-디스카우의 미덕으로 가사와 음악의 유기적 통합을 들었다. 가사를 정확한 발음으로 전달하는 그의 가창은 후대 가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악보의 기계적인 재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흡에 자신만의 개성을 불어넣으면서도 정확성과 자연스러운 울림을 잃지 않는 것이 그의 특별함이었다.
피셔-디스카우는 자신의 지식을 후대에 전하는 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방대한 가사집을 출간하고 가곡 작곡가들의 전기를 냈으며, 주요 가곡들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남겼다. 그가 세계대전 이후 명맥을 위협받던 독일 예술가곡을 부활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 / 사진. ⓒDeskau, Berlin
외르크 데무스, 알프레트 브렌델, 다니엘 바렌보임 등 거장 피아니스트들과의 녹음도 빠질 것 없이 훌륭하지만, 오늘날 피셔-디스카우와 나란히 기억되는 동반자는 무어다. 두 사람이 수많은 공연과 녹음을 통해 서로의 연주와 해석을 다듬어나갔을 뿐 아니라, 무어가 일류 가수 못지않게 가곡 해석에 정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어는 1975년 슈베르트 연가곡에 대한 해설서를 내기도 했다. 피셔-디스카우와 슈베르트 연구가 리처드 카펠에게 헌정된 이 해설서는 가곡에 대한 그의 해박하고 꼼꼼한 지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피셔-디스카우는 예술가곡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의 우려는 날이 갈수록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사색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가곡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하지만 피셔-디스카우와 무어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오래도록 그 등불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