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칼럼] ▶▶▶ ① 야수파의 모던보이 구본웅...청계천 따라 소공로까지, 그 자취를 밟다
[이전 칼럼] ▶▶▶ ② 허튼 길을 걷던 모던보이...다시 효자동으로 향한 구본웅
[이전 칼럼] ▶▶▶ ③ 도쿄로 향한 구본웅...새로운 사조의 '신미술'을 주도하다


1931년 첫 개인전-동아일보 사옥

유학 중이던 1931년 일시 귀국한 그는 『동아일보』 옥상 전시장에서 그해 6월 12일부터 5일간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 개최 전에 월간 종합지인 『東光(동광)』 5월호에는 그가 몇 달 전에 귀국해 ‘수창동 화실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작품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실렸다.

이미 태평양전, 이과전과 독립전에 입상한 작가로 알려지면서 미술계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화가의 근황 기사가 실리는 등 적지 않은 유명세가 『동아일보』의 제안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일본에서 다수의 전람회에 입상을 했더라도 재학생 신분으로 개인전을 신문사에서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좌] 1926년 신축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 사진. ⓒ동아일보(1926.12.11.)  [우] 구본웅 개인전 기사, 제목으로나마 전시 작품을 모두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례다. / 사진. ⓒ동아일보(1931.6.12.)
[좌] 1926년 신축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 사진. ⓒ동아일보(1926.12.11.) [우] 구본웅 개인전 기사, 제목으로나마 전시 작품을 모두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례다. / 사진. ⓒ동아일보(1931.6.12.)
그는 전시회 개최의 물리적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개인전에 일상의 주변에 있는 정물화와 풍경화 위주로 50점을 출품했다. 『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은 서울에서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고 여러 작품 중에서 자신 있는 작품만을 엄선했다고 자부심도 드러냈다. 특히 『동광』의 취재 기사에서는 전시 준비 작품 중에 ‘폭포 줄기처럼 쏟아지는 부랑(浮浪)한 선이 요즘에는 마르크 샤갈과 키스한다.’라고 한 작품이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도쿄에서 ‘생각하고 연구’했던 새로운 풍의 그림 중 샤갈의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본웅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전시회로 이어져 ‘앞을 다투어’ 관람객이 들어설 정도로 넘쳐나 개막 초부터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일본의 이과전과 독립전에서 새로운 가치를 휘두른 키 작은 선생님’, 신체적으로 ‘허약한 화가’로 소개되면서 작품의 전위성과 신체적 결함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를 ‘경성의 로트렉’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 역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멈추는 장애를 갖게 되어 왜소한 외모를 지녔지만 이를 예술로 극복하고 ‘몽마르트의 별’이라 불리며 ‘탈인상주의’의 거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좌] 툴루즈 로트렉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우] 툴루즈 로트렉, <물랭루주에서> 군중 속의 지화상,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23x140cm, / 그림출처. ⓒ시카고 미술관
[좌] 툴루즈 로트렉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우] 툴루즈 로트렉, <물랭루주에서> 군중 속의 지화상,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23x140cm, / 그림출처. ⓒ시카고 미술관
이러한 자극적인 화제성과는 달리 화가이자 평론가인 김주경은 『조선일보』 평론 기사에 구본웅 개인전을 ‘1931년의 신기록으로 특기할 만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제까지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다. 연(然)이나 씨가 발표한 작품 전부가 쉬르라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큐비즘과의 중간층과 포비즘과의 중간층 내지 익스프레셔니즘, 또는 임플레이셔니즘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되었음을 부기하여 둔다.”
조선일보 (1932.1.3.) 화단의 회고와 전망

조선에 처음으로 초현실주의를 소개하였고, 입체파, 야수파, 표현주의, 인상파 등의 작품을 받아들여 작가 나름으로 소화한 작품들의 전시회라고 했다. 그만큼 당시 전통 화단에 비해 상당히 전위적인 시도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위적인 작품은 당시 화단이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한계를 안고 있었다. 서구의 전위미술이 어느 정도 일정한 시대 흐름에 따라 고전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입체주의와 야수주의,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순으로 생겨난 반면, 조선화단은 당시 일본에 들어와 있던 서구 미술 사조의 모든 경향을 한꺼번에 수용하여 소개하는 혼돈 상태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술 사조의 변화에 따른 이전 단계의 미술이 성숙되기도 전에 불쑥 몇 계단을 뛰어넘는 화풍이 구본웅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 서양화 작품 경향이 카오스처럼 혼재되었거나 바다의 섬처럼 다양했던 것이다.
한편, 구본웅은 이번 전시를 통해 화가들의 경제적 문제와 전시 장소의 빈곤에 대한 어려움과 화단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패기도 보여주었다.

“ 조선사람 화가는 너무나 침체합니다. 첫째 발표기관이 없는 것도 경제적으로 혜택을 못 입는 것이요. 그보다 더 자극을 못 받는다는 것이 침체의 한 원인인 것이 조선화인 것 같습니다. 조선인화가들도 국제적으로 진출할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하 생략.”
매일신보 (1931.6.10.)
구본웅 개인전과 인터뷰 기사 / 사진. ⓒ매일신보(1931.6.10.)
구본웅 개인전과 인터뷰 기사 / 사진. ⓒ매일신보(1931.6.10.)
특히 화가들의 매너리즘과 도전 의식이 부족하다는 그의 일갈은 후에 구본웅 스스로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으로 보여주게 된다. 첫 개인전은 스물여섯 미술학도에게 벅차고 주목받는 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전시는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기도 했다.

1931년 경성의 다방-살롱 멕시코, 소묘전

구본웅은 유학 중에 개인전 외에도 1931년 11월 4일부터 10일까지 종로에 있는 다방 ‘살롱 멕시코’에서 도쿄시절에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도상봉, 이해선과 함께 《소묘전람회전(데생전)》을 한 적이 있다. 이 전시에는 모두 35점의 작품을 선보였으나 조선일보의 소묘전람회 개최 기사 외에는 작품에 대한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화단에 중진인 구본웅, 도상봉, 리해선 삼화백의 「뎃상」 (소묘) 전람회를 4일부터 10일까지 종로 2정목 살롱 멕시코에서 개최하기로 되엿는데 조선화단에서 처음인 이채있는 전람회인 바 살롱 멕시코의 다객(茶客)은 관람할 수 있는데 점수는 35점이라 한다.”
조선일보(1931.11.5.)

다만 개최장소가 ‘살롱 멕시코’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멕시코’는 1929년 11월 도쿄미술학교 도안과를 나와 배우 생활을 하는 김용규와 배우 심영이 문을 연 다방으로 YMCA에서 탑골공원 방향으로 두어 집 건너에 있었다. 개업할 때 이들과 알고 지내던 화가 도상봉과 구본웅, 사진작가 이해선, 무대장치가 김정환 등 친구들이 의자, 테이블, 실내장식을 직접 두들겨 만들었다고 한다.

‘멕시코’의 외관은 독특했다. 지금 봐도 눈에 띌 것 같다. 다방 이름인 ‘MEXICO’는 영어로 돌출 간판을 달고, 한글로 된 ‘멕시코’는 부착 간판으로 달았으며, 무엇보다 위쪽에 커다란 물주전자를 매달아 놓았으니 누가 보아도 한 번쯤 쳐다볼 만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내부의 벽은 헌마대 조각을 사용했고, 광목에 염색을 해서 커튼을 만들고 색깔은 빨갛고 흰색 등 원색을 사용해 원시적인 느낌을 살리려 했다고 한다. 또한 벽에는 최승희의 나체 무용 포즈 사진, 영화 ‘모나리자의 실종(Der Raub der Mona Lisa)’, ‘스페인 광상곡(The devil is a woman)’ 등 몹시 선정적인 포스터를 걸어 놓았다.
[좌] 소묘전람회가 열렸던 종로2가 살롱 멕시코 / 사진출처. 송풍수월 블로그(https://blog.naver.com/ohyh45)  [우] 소묘전람회 개최 기사 / 사진. ⓒ조선일보(1931.11.5.)
[좌] 소묘전람회가 열렸던 종로2가 살롱 멕시코 / 사진출처. 송풍수월 블로그(https://blog.naver.com/ohyh45) [우] 소묘전람회 개최 기사 / 사진. ⓒ조선일보(1931.11.5.)
이곳에는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문학가, 구본웅과 같은 화가, 음악평론가 홍종인, 배우 복혜숙, 서월영, 신문 기자 김을한 등 당대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멕시코’에서는 자연스럽게 시낭송회와 소품발표회 그리고 도상봉, 이승만 등 화가들의 개인전이 열렸다. 이런 분위기의 다방에서 《소묘전람회》를 가진 것은 당연할 수 있다.

1930년대는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와 만주사변으로 전시 동원 체제가 강화되고,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농촌이 몰락하면서 도시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카페, 다방, 백화점, 네온사인, 광고, 댄스 홀, 은행, 전차 등 대중 소비 문화가 자리 잡으며, 그 주체로 모던보이, 모던걸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적 성향의 식민지적 근대성이 욕망의 공간을 점령하던 시기이다. 즉, 비극적 시대 상황과 서구식 근대 문화가 들어와 공존하던 때이다.

특히 이때의 다방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시인 이용악(1914-1971)은 「다방」 이라는 시에서 ‘바다없는 항해에 피곤한 무리들 모여드는 다방은 거리의 항구’이자 ‘주머니를 턴 커피 한잔에 고달픈 사고를 지지하는.... 유연하게 조화로운 분위기’가 있는 피항지라고 했다. 마치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경성 거리를 배회하는 구보씨처럼 동경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직업을 찾지 못한 소위 젊은 지식인-룸펜들이 시간을 소비하는 곳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로 시인 이상이 그렸다. 탁자 위의 찻잔과 등받이가 있는 의자가 놓여 있고, 왼쪽에 눈을 감은 채 얼굴을 감싸고 있는 사람이 있다. 구보 자신이다. / 사진. ⓒ조선중앙일보(1934.8.14.)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로 시인 이상이 그렸다. 탁자 위의 찻잔과 등받이가 있는 의자가 놓여 있고, 왼쪽에 눈을 감은 채 얼굴을 감싸고 있는 사람이 있다. 구보 자신이다. / 사진. ⓒ조선중앙일보(1934.8.14.)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그들의 눈은 그 광선이 부족하고 또 불균등한 속에서 쉴 사이 없이 제 각각의 우울과 고달픔을 하소연한다.”(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9, 조선중앙일보 1934.8.4.)

또한 소설가 최정희(1906-1990)는 ‘다방은 좋은 나의 휴게소다. 소잡한 음향과 수학적으로 꾸며진 가두풍경에서 권태를 느끼게 되는 도시인-’모더니스트‘ 새로운 예술가들 중에 다방과 접촉을 멀리하는 이가 있다면 그만큼 불행한 사람이라고 나는 단정한다.’고 했다. 초창기 다방이 ‘멕시코’와 같이 출판 기념회, 시 낭송회,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신문물과 지식 교류의 장으로 ‘모던’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에게는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선 일상적인 사교 공간이었다고 한 것이다.
낙랑, 멕시코, 비너스 광고 / 사진. ⓒ삼천리(1937.5.1.)
낙랑, 멕시코, 비너스 광고 / 사진. ⓒ삼천리(1937.5.1.)
193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다방은 조선호텔 건너편에 동경미술학교 출신 이순석의 ‘낙랑파라’, 종로1가에는 시인 이상의 ‘제비’, 조선상업은행 옆 소공동에 극작가 유치진의 ‘플라타너스’, 인사동에는 배우 복혜숙의 ‘비너스’ 등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당대의 지식인, 예술가는 물론 얼치기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모여 근대 소비도시 식민지 경성의 울분과 새로운 문화가 어지럽게 공존하던 사유의 집합소였다.

김해경과 이상 그리고 구본웅

한편, 구본웅이 동경 유학 중 경성에서 개인전과 소묘전을 개최하던 1931년, 그해 5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그가 귀국 후 오래된 우정을 어른스럽게 쌓아가게 되는 신명보통학교 동창 김해경이 ‘이상’이라는 작가로 <자화상>을 출품하여 입선한다.

그때 그들이 서로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3년 구본웅의 귀국과 함께 이상이 1936년 동경으로 떠나기 전까지 화단과 문단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이야기를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둘은 ‘절친’으로 근대 문화예술계를 이야기할 때는 늘 함께 등장한다.
[좌]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개막전 / 사진. ⓒ매일신보(1931.5.24.)  [우] 이상 <자화상> / 사진. ⓒ 제10회(1931년) 조선미술전람회도록
[좌]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개막전 / 사진. ⓒ매일신보(1931.5.24.) [우] 이상 <자화상> / 사진. ⓒ 제10회(1931년) 조선미술전람회도록
심원보 미술사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