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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번 붓질, 행위만 남다…김홍주의 '무제'
실험미술·세필화백 50년
'김홍주: 표면에 남다' 개인전
프레임·나무틀 없는 천에 작업
긴 세필 노동에 자아 사라지고
꽃 그리던 순간 무의식만 남아
내달 14일까지 대치동 S2A 전시
'김홍주: 표면에 남다' 개인전
프레임·나무틀 없는 천에 작업
긴 세필 노동에 자아 사라지고
꽃 그리던 순간 무의식만 남아
내달 14일까지 대치동 S2A 전시
◇‘꽃의 화가’ 50년 여정
김홍주 화백의 그림이 전시될 때 가장 낯선 것이 하나 있다. 프레임이 없다. 작업할 때도 캔버스를 팽팽하게 지지해주는 스트레처(나무틀)를 거부하고 바탕 처리가 되지 않은 천 위에 직접 붓을 댄다. 고정되지 않은 캔버스 위를 지나간 세필의 흔적들은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무제’라는 제목을 단 그의 작품들은 지독한 노동의 결과다. 멀리서 보면 풍경이나 꽃처럼 보이는 형상은 한 걸음 다가갈수록 무수한 선의 집합체로 해체되고 다시 만난다. 얇은 천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수만 번의 붓질, 단순히 대상을 정교하게 만들기 위한 세필이 아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수천수만 번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아는 사라지고 오직 행위만 남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1970년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창문이나 거울 등 길거리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과 결합한 오브제 작업은 ‘보는 방식’에 대해 작가가 얼마나 깊게 탐구했는지, 그것이 지금의 세필 작업과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다. 정교하게 그린 김홍주 화백의 꽃잎은 꽃의 복사본이 아니라 꽃을 그리던 순간 작가가 머물던 무의식의 궤적이다.
“항상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작업했어요. 작업실이 클 땐 대형 작업을, 작을 땐 소형 그림을요. 달라지지 않은 건 세필화라는 사실뿐이죠.”
◇표면은 가장 실존적인 상태
홍익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원래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뒤늦게 그림에 재능을 발견했다. 교사로 일하며 돈을 모아 홍대 미대에 진학했는데, 당시 박서보 화백이 학교 교수였고 이건용 작가가 동기였다. ST그룹이라는 전위예술 그룹이 결성돼 토론과 전시가 이어지던 시기였다.“그땐 개념미술이 큰 흐름이었는데, 새롭다 싶어 도전해보면 다 서양미술에서 이미 한 것이더라고요.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이 컸는데, 어떤 사조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것 위주로, 남들과 다르게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다 보니 청계천 기물을 가져다가 그 위에도 그려보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을 제 나름대로 해석하게 됐습니다.”
작품을 다 보고 다시 입구로 돌아오면 작가가 왜 그토록 ‘의미’를 부정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 회화란 ‘무엇을 그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남겨지는가’의 문제였다는 걸 알 수 있어서다.
수많은 화가가 심오한 상징을 설명하려 할 때, 김홍주 화백은 표면의 가치를 역설해왔다. 그에게 표면이란 어쩌면 깊이 없는 껍데기가 아니라, 작가의 수행과 감각이 응축된 가장 실존적인 상태이지 않았을까. 회화의 본질은 거창한 메시지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붓과 천이 만나는 그 찰나, 그리고 그것을 지속하는 인간의 의지에 있다는 사실도. 그저 캔버스 위에 남겨진 노장의 정직한 흔적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회복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다. 전시는 3월 14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