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길을 재촉하고, 점심시간 짬을 내어 산책하며, 스마트폰의 만보계 숫자를 확인하며 우리는 뿌듯해한다. "오늘도 충분히 걸었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로 ‘걷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이동’하고 있는가.
현대인의 걸음은 진정한 의미의 보행이라기보다 ‘걷는 흉내’에 가깝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다리를 교차하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다. 발끝이 지면의 질감을 읽어내고, 그 정보가 뇌로 전달되어 전신의 근육과 신경이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신경계의 협주곡’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의 보행에서 이 섬세한 협연은 멈춘 지 오래다.
이 ‘걷는 착각’의 주범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보호한다는 문명의 이기들이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대변되는 매끄러운 도시의 지면은 발이 적응할 기회를 뺏어버렸다. 발바닥이 지형의 변화를 감지할 필요가 없으니 발가락의 미세한 근육들은 퇴화하고, 지면의 충격은 발이 아닌 무릎과 허리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신발 또한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더 두꺼운 쿠션, 더 편안한 기능성을 강조할수록 발의 감각은 무뎌진다. 편안함은 곧 감각의 마비를 의미한다. 발가락이 자유롭게 지면을 움켜쥐지 못하고 딱딱한 신발 속에 갇혀 지내는 동안, 우리 몸의 무의식적 방어 기제인 ‘반사 신경’은 잠들고 만다. 뇌는 이제 발바닥의 신호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정보와 머리의 계산에 의존해 억지로 균형을 잡는다. 현대인의 걸음이 빠르면서도 불안하고, 조금만 걸어도 피로가 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어 무릎과 허리가 아픈 것을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의 탓이 아니라 ‘감각의 퇴화’ 탓이다. 몸의 치유력은 여전하지만, 지면의 신호를 읽어 들일 뿌리가 고장 났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걷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운동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본래 알고 있던 태초의 움직임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뗄 때처럼 발가락으로 지면을 느끼고, 발뒤꿈치부터 앞꿈치까지 리듬감 있게 구르는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단순하다. 하루에 몇 분이라도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서 보는 것이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감촉, 앞뒤로 실리는 무게중심을 천천히 관찰해 보자. 이 사소한 인식이 회복의 시작이다. 뇌가 잊고 있던 ‘발’이라는 존재를 다시 인식하는 순간, 몸의 신경계는 재부팅되기 시작한다.
건강은 걷는 ‘양’이 아니라 ‘질’에서 결정된다. 만보계의 숫자를 채우는 데 급급하기보다, 단 백 걸음을 걷더라도 내 발이 지면과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지를 느껴야 한다. 발이 지면을 느끼고 몸이 그 신호에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는 지능’을 가진 인간으로 돌아간다.
걷는다는 것은 결국 몸이 스스로를 기억해 내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각을 찾아 이제 막 첫발을 떼려는 중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홍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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