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가 바뀐 1900년대 초. 빈 대학교 대강당은 사람들의 술렁이는 목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곳 천장에는 세 점의 대형 천장화가 걸릴 예정이었습니다. '철학', '의학', '법학' — 대학의 핵심 학부들이 지향하는 진리와 학문적 이상을 상징하는 그림들이었죠. 이 중대한 과업을 맡은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였습니다. 당시 클림트는 이미 빈 예술계의 총아(寵兒)였습니다. 장식적인 화려함과 서양 고전미를 계승한 감각적인 표현으로 세간의 찬사를 한 몸에 받던, 뜨겁게 빛나는 별이었죠. 천장화 작업을 그에게 의뢰한 빈 대학은 클림트가 이번에도 비슷한 분위기로 세 학문을 웅장하게 형상화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클림트가 내놓은 그림은 상상을 초월했고, 대학 측은 경악했습니다.
작자미상, 사진으로 촬영된 <빈 대학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90~1900년경 클림트의 스캔들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이 유서깊은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 이미지 출처. 미국 의회도서관
빈 대학을 위해 그려진 클림트의 ‘학부 회화 연작(Faculty Paintings)’에서는 신격화되고 장엄한 모습의 ‘학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대신 그가 그린 세 개의 거대한 유화 속에는 이리저리 뒤엉킨 나체와 거기서 비집고 흘러나오는 인간의 나약함, 욕망, 그리고 죽음뿐이었습니다. <철학>의 좌측에는 남녀노소의 벌거벗은 몸들이 어두운 표정과 고뇌하는 모습으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나체의 행렬은 어린아이에서 노인까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환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요란함 속, 그림의 오른쪽에 눈감은 채 한없이 펼쳐진 별과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미지의 형상, '세상'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림 아래에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지혜'가 얼굴만을 내민 채 빛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나체 행렬의 마지막, 노인 곁에 겨우 모습을 드러낸 '지혜'는 삶의 끝에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는 씁쓸한 진실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 그림은 혼란한 삶의 허무함과 진리를 향한 탐구의 무의미함에 대한 클림트의 사색을 담고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빈 대학교 천장화(학부 회화) 연작: 철학>의 흑백사진, 1899~1907년(1900년 첫 공개). 원본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 이미지 출처. 위키아트
<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알몸의 인간 군상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기둥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새로운 생명을 담은 임산부 또한 포함되어 있는데요, 이 육체들은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몽환적인 모습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림 하단 중앙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위생과 건강의 여신 ‘히기에이아(Hygieia)’가 화려한 의상과 의술을 상징하는 뱀을 몸에 두른 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면을 응시하며 묵묵히 서 있습니다. 좌측 중앙에는 양팔을 활짝 벌린 한 여인이 서 있는데요, 일부 평론가들은 그녀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상징하며, 오직 죽음만이 진정으로 인간을 병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과학과 의학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인간의 취약성과 죽음,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생명의 흐름에 대한 클림트의 파격적인 시각을 대변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빈 대학교 천장화(학부 회화) 연작: 의학>의 흑백사진, 1899~1907년(1901년 첫 공개). 원본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 이미지 출처. 위키아트
‘학부 회화 연작’ 중 마지막으로 공개된 작품인 <법학>은 앞선 두 작품과는 궤도 자체가 달랐습니다. 이미 클림트는 <철학>과 <의학>으로 빈 대학 측의 거센 비난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순수하고 이상화된 누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노쇠하고 쭈그러든 노인의 나체, 여성의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장면들은 대학 당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대학 측은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예술의 자유와 표현을 존중하지만, 흉측한 그림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로써 양측의 관계는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클림트 역시 자신의 연작이 대강당 천장에 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예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법학>에서는 화풍마저도 달라졌고, 그 안에는 노골적인 적의와 사회에 대한 클림트 자신의 비판적 메시지가 더욱 뚜렷하게 담겨 있습니다.
얼굴을 숙인 채 죄책감에 사로잡힌 듯한 맨몸의 한 노인이 ‘크라켄(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문어 모양의 괴수, Kraken)’처럼 보이는 괴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노인의 표정은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의 양옆에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세 명의 ‘에리니에스(Erinyes)’ 자매가 서 있습니다. 에리니에스는 그리스 신화 속 복수의 여신들로, 서양에서는 '퓨리(Furies)'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저승에서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이들은 마치 노인의 고통이 별일 아니란 듯, 시선을 피하거나 눈을 감은 채 무심합니다. 그림의 상단에는 진실(Veritas), 정의(Justitia), 법(Lex)을 상징하는 세 명의 우화적 존재들이 멀리 떨어져 서 있습니다. 그들 역시 경직된 자세로, 고통받는 노인을 앞에 두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방관하는 모습은 법과 정의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시사합니다. 더욱이 에리니에스 주변에는 잘린 머리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는 당시 법을 집행하던 판사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클림트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정의 실현은 외면하고 형벌에만 집중하는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빈 대학교 천장화(학부 회화) 연작: 법학>의 흑백사진, 1899~1907년(1903년 첫 공개). 원본은 화재로 소실되었다. / 이미지 출처. 위키아트
‘학부 회화 연작’이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클림트는 빈 정부와 지식인들로부터 오는 격렬한 항의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대학 교수들은 작품을 ‘외설’이라고 규탄했으며, 언론과 평단은 ‘대학교의 수치’라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클림트의 학력을 거론하며, 그의 작품을 ‘피상적인 지식에서 비롯된 실수’라고 깎아내리기도 했습니다. 교육부는 수정 요구를 넘어 그에게 작품의뢰를 철회하겠다고 통보했으며, 무려 87명의 교수가 공동 항의 서한을 제출함으로써, 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로까지 번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클림트는 국가가 후원하던 ‘빈의 대표 예술가’에서 하루아침에 ‘천박한 포르노 제작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그가 공립 교육기관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것조차 금지합니다. 모욕감과 분노에 휩싸인 그는 즉시 앞서 받은 보수를 반납했고, ‘학부 회화 연작’을 자신이 소유하겠다고 선언했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정부의 의뢰를 다시는 받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수모를 겪은 클림트는 이후 <금붕어>라는 작품을 만드는데요, 풍만한 엉덩이를 그림을 보는 관객들에게 들이미는 도발적인 자세와 여성들의 비웃는 듯한 표정, 그리고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였다는 점에서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금붕어>, 1901~1902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박으로 칠해진 금붕어 마저도 비웃는 표정으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 이미지 출처. 솔로투른 시립 미술관
그날 이후 클림트는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향해서 말이지요. 그의 황금시대는 그렇게 막을 올렸습니다.
금빛과 살결의 화가
19세기 말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는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아르누보 등 기존의 방식을 넘어선 예술 실험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은 여전히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 양식에 얽매여 있었고,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유가 크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삶의 본질과 제도 밖에서 새로운 감각적 가능성을 모색하던 클림트는 자신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 예술가들을 주변에 모으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97년 클림트는 보수적인 빈 미술계의 틀을 깨기 위한 예술 운동인 ‘빈 분리파(Vienna Secession)’의 공동 창립자가 됩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모든 예술에는 자유를.”
이 구호 아래 그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양한 성향의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분리파 전시회 체제’를 만들어냈습니다. 빈 분리파는 특정한 화풍이나 이념을 강요하지 않았기에 인상주의자, 상징주의자, 장식미술가, 건축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이 흐름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클림트는 이 새로운 집단을 통해 오스트리아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전했고, 더 나아가 빈이라는 도시 자체를 국제적인 예술 실험의 무대로 탈바꿈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 <빈 분리파 전시관>, 1897년.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모든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구호가 입구에 적혀있다.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01년 클림트는 자신의 예술적 절정기에 이르는 ‘황금 시대(Golden Phase)’에 들어섭니다. 중세 비잔틴 제국 모자이크에서 받은 영감, 그리고 영국에서 시작된 ‘미술 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장식적 미학. 이 두 가지 영향 아래 클림트는 금박을 화폭 위에 아낌없이 사용하며 육체를 관능적이고 신비롭게 빛나는 형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탄생한 대표작이 바로 <키스>와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입니다. 공예와 그림을 융합한 이러한 독창적 작품들은 클림트를 당대 최고의 거장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과 외설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는 격렬한 비판도 따라왔죠.
[왼쪽부터]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1907~1908년'과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 1907년'. / 이미지 출처. 벨베데레 궁전, 노이에 갤러리
클림트가 매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의 의견은 나뉘었습니다. 찬양하는 이들은 그를 버려진 고대의 장식 예술을 부활시킨 선구자로 보았습니다. 반면 비판자들은 그가 외설을 과도한 장식으로 위장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클림트는 자신의 예술을 해명하거나 옹호하는 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여러 혹평에 직면하던 1900년 무렵 그는 드물게 직접 쓴 글을 한 신문에 기고하며 자신의 창작 태도를 간접적으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해당 글에서 작가란 작품을 통해 말하는 존재라고 강조했습니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라.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클림트는 창작자가 자신의 의도를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감상자 스스로 작품 속에서 의미를 찾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던 것이지요.
모리츠 네어, <구스타프 클림트>, 1910년. 구스타프 클림트가 자신의 작업실 앞 정원에 파란 작업 가운을 입은 채 고양이를 안고 있다. / 사진 출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생애 후반부로 갈수록 그는 점점 대중의 시선에서 물러나, 파란 작업 가운을 걸친 채 작업실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고양이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던 바로 그 해, 클림트는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뇌졸중과 폐렴 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성의 나체, 에로티시즘, 신화 그리고 삶과 죽음. 이것들은 클림트의 예술 속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핵심 주제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가 육체를 부끄럽거나 맹목적으로 찬양할 대상으로도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몸이 품은 양면성: 신성하면서도 세속적이고, 강인하면서도 연약하며, 고우면서도 추한 그 모든 면을 탐닉했습니다.
그녀의 살결 위에 금박을 올리다··· 다나에의 ‘황금빛 오르가즘’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스(Argos)의 왕국을 다스리던 임금 아크리시오스(Acrisius)는 자신이 손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습니다. 이 예언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딸 다나에(Danaë)를 청동탑에 감금합니다. 그러나 엉큼한 바람둥이 신 제우스는 황금빛 소나기로 모습을 바꾸어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러 방 안으로 스며듭니다. 클림트는 이 그리스 고전을 조금 더 육감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하는데요, 그의 1907년 걸작 <다나에>는 신성한 오르가즘 그 자체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다나에>, 1907년. 알 속에 담긴 듯한 구도 속, 그녀는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서 황홀한 경험을 받아들인다. / 이미지 출처. 개인 컬렉션 소장/필자 제공
그림에는 다나에로 보이는 한 여인이 몸을 웅크린 채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몸은 관능적인 곡선을 이루며, 허벅지는 서로 바싹 붙어 있습니다. 그녀의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고, 눈은 감겨 있어 황홀한 기분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는 황금색 원형 무늬들이 휘몰아치면서 흘러 들어오는데, 이는 황금 소나기로 변신한 제우스를 상징합니다. <다나에>는 클림트의 특징인 금색과 보라색, 검은색이 조화롭게 사용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의 모자이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장식적인 요소들이 그녀의 왕족 신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림의 요염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이 고전을 재현하면서 흔히 등장하는 거룩한 분위기를 걷어냅니다. 대신 그의 시선을 훨씬 더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 집중합니다. 그림 속 다나에는 더 이상 신의 의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우스가 자신의 살결을 어루만지며 몸속으로 들어올 때, 그녀의 표정은 강렬한 쾌락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화 속의 존재가 마치 평범한 여성처럼 그려지고, 게다가 그녀의 가장 은밀한 경험을 이렇게 거리낌 없이 화폭 속에 담다니! 부인할 수 없는 선정성을 담은 <다나에>는 역시 외설 논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음탕함으로 타락한 신화’라는 질책을 받았지만, 오늘날의 미술사학자들은 이를 재평가해 여성의 쾌락을 정면으로 담은 ‘기념비적인 순간’으로 찬양합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다나에 또는 다나에와 황금 소나기>, 1542~1543. 티치아노의 <다나에>는 황금비가 내리는 순간을 포착했다면, 클림트의 <다나에>는 그 황금비를 온몸으로 느끼는 황홀경 그 자체를 그렸다. / 이미지 출처.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
그가 생전에 공개한 <다나에> 외에도 여성이 절정에 이르거나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담은 습작을 다수 남겼습니다. 클림트의 드로잉은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그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로 취급받지만, 정작 본인은 살아생전 이를 일절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과도한 에로티시즘이 또 다시 대중의 비난을 불러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죠.
구스타프 클림트, <포옹하는 두 여성 누드>, 1903~1904. / 이미지 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소묘의 대가’ 클림트의 에로틱 드로잉은 그가 여성의 형태와 관능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탐구하기 위한 친밀하고 직접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이 스케치 속의 누드화는 포르노그래피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전시를 전제하거나 의뢰받은 회화에서는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해 신화와 우화 속 상징을 사용해 수위를 조절했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한 드로잉에서는 그 어떤 검열도 없이 관찰한 모습을 숨김없이 담았습니다. 드로잉 속의 여성들은 당당하게 스스로의 몸을 마음껏 뽐내는 동시에, 때로는 과도한 친밀감 속에서 서로 포옹하거나 다리를 벌려 자위를 합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클림트가 예술을 핑계로 여성들을 성적으로 이용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의 드로잉을 여성의 성적 자율성과 해방의 표현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클림트의 드로잉 속 여성들은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만족을 위해 존재합니다.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작가 자신도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차분하게 바라볼 뿐입니다. 어쩌면 그에게 중요한 건 이상화된 ‘여성성’이 아니라, 실제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여성’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클림트의 드로잉은 성적 주체성과 감각의 자유를 탐색하는 장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오른쪽을 향해 다리를 쭉 뻗고 반나체로 누워, 자위행위를 하는 여성>, 1912~1913. / 이미지 출처. 레오폴드 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 <속옷 차림으로 다리를 벌리고 머리를 뒤로 젖힌, 자위행위를 하는 여성>, 1916~1917. / 이미지 출처. 레오폴드 미술관시대를 초월하는 금빛 아름다움
관능적인 여성의 초상, 신성함과 에로티시즘이 교차하는 장면들, 수치심이 아닌 빛으로 재해석된 누드. 이 모든 것이 그를 예술사에서 불멸의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한때 소수의 시선만을 암암리에 허락받았던 이 대담한 그림들은 이제 대중 앞에 당당히 서서 그 존재감을 빛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클림트는 단지 한 명의 화가를 넘어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자 세계인이 사랑하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작품만을 집중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전용 미술관 투어와 관광 프로그램이 빈에서 운영될 정도로, 클림트는 현대 미술 시장과 대중문화 모두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합니다. 오늘날 클림트의 가장 도발적인 작품들은 전 세계 유명 미술관에 걸려 있으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은, 2006년 경매에서 1억 3,500만 달러(약 1,900억원)에 팔리며 클림트의 문화적 영향력을 다시금 입증했습니다. 최근에는 구글 예술문화(Google Arts & Culture)와 벨베데레 미술관(Belvedere Museum)이 협력하여, 화재로 유실된 ‘학부 회화 연작’의 흑백 사진을 클림트의 색채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AI)을 통해 복원해냈습니다. 머신 러닝 알고리즘은 클림트의 회화 스타일을 학습하여, 사라진 색채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단지 디지털 복원을 넘어 지워진 예술을 되살리려는 기술과 예술의 협업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클림트는 수많은 역사적 굴곡 속에서도 몸과 욕망, 자유에 대한 갈증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던 예술가로 남습니다. 그가 그린 황금빛 기운은 여전히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복원된 ‘학부 회화 연작’, 좌측에서부터 <철학>, <의학>, <법학>이 화려한 색을 입었다. / 필자 제공
이지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