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들면서 늘 조심했던 게 있다. 중요해 보이지만 어려울 것 같다고 생략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를 쉽게 안심시키는 문장들이다. “이 정도만 알면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충분하다” 같은 방식은 매끈해 보이지만, 사유의 문을 닫아버릴 수 있다. 나는 독자가 책 앞에서 작아지는 순간을 싫어했다. 책이 해야 할 일은 부담을 덜어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가능한 최선의 이해를 제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독자를 존중한다는 말은 읽는 쪽의 이해력을 낮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심이 생기면 사람은 어떤 주제든 자기 방식으로 소화한다. 내가 생각하는 친절은 모든 걸 풀어 설명하는 기술보다는, 설명이 끝나는 지점과 질문이 시작되는 지점을 함께 보여주는 일에 가깝다.
경제서든 인문서든 그 믿음은 같았다. 낮에는 선택하고 밤에는 견디는 사람에게, 숫자와 서사의 구분은 출판의 편의일 따름이다. 산만해 보이는 내 포트폴리오도 결국 그 결을 따라간 결과였다.
책 읽는 여자(Interior with a Reading Lady), 빌헬름 함메르쇼이, 1900. / 이미지 출처. 위키커먼스독자는 작품을 ‘즐기는’ 연주자다
한 아티스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술에 문외한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이 화가는 뭘 말하고 싶었을까?’라는 관점을 제시하면 난해한 현대 미술 앞에서도 갑자기 할 말이 많아집니다. 정답이 사라지는 순간,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하니까요.” 이 말은 오래 남았다. 아는 만큼 보는 게 아니라, 자기 관점이 생기는 순간 작품이 열리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압축하는 해석, 일종의 ‘정답 찾기’ 행위를 수전 손택은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진정한 예술에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예술 작품을 내용으로 축소하고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그 작품을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기대에 부합하는 것으로 만든다.” - 『해석에 반하여』 중에서
나는 독자가 자기 분야에서는 언제든 저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읽는 이는 무지한 소비자가 아니다. 각자의 삶에서 이미 수많은 판단과 선택을 해왔다. 저자는 혼란을 정답으로 정리해주는 사람이라기보다, 지금까지 도달한 최선의 답과 아직 열려 있는 질문을 함께 건네는 사람에 가까운 쪽이다. 편집자로서 나는 독자들이 저자의 질문과 그걸 던진 용기를 알아봐주고 기꺼이 즐기길 바라면서, 우리 시대 공기를 배경으로 조율한다.
무시무시한 음악가들(The Frightful Musicians), 제임스 앙소르, 1891. / 이미지 출처. 위키커먼스
사실 단순하고 명쾌한 설명, “그래서 어쩌라고?”에 대한 답으로 직진하는 글은 읽기 편하다. 반면 결론을 늦추는 글은 독자에게 일을 맡긴다. 나는 그 불편함을 독서가 제대로 작동하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좋은 책은 새로운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기보다, 내 안에 묻혀 있거나 헝클어진 생각을 끌어올려 그 문장에 견주어 보게 한다. “내가 정말 이렇게 믿고 있었나?”, “이 문장은 왜 불편하지?” 이런 질문이 생긴다면 그 책은 이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읽고 나서 마음이 더 복잡해질 때도 있다. 그 복잡함은 대개 판단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독자를 존중한다’는 말의 뜻도 달라진다. 쉽게 풀어주는 일도, 결론을 빨리 제시하는 일도 때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생각을 낭비하지 않게 해주는 일을 우선한다. AI가 결론을 대신 내주는 시대일수록 독자의 판단이 살아나는 책을 만들고 싶다.
혹시 오래 책을 멀리했다면 다시 시작할 의무는 없다. 다만 한 번쯤은 쉽게 닫히지 않는 책을 펼쳐보면 좋겠다. 결론을 대신 내주지 않고, 읽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책이다. 『해석에 반하여』는 지성이 무겁게 들씌우는 의미 부여에서 창작의 정신을 보호하자는 조용한 외침이다. 독자는 그럴듯한 읽을 이유를 찾기보다, 복잡한 세상을 묘사한 질문을 얻은 그 상태를 누려도 충분하다. 해방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이 스칠지도 모른다. “아, 이래서 내가 책을 읽지.” 그리고 책을 멀리했던 사람도 부담 없이 중얼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 한 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