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로 회자하는 영화의 개봉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는 작품으로 악명 높은 <칼리굴라>(1979), 검열과 상영 금지로 컬트가 된 <포제션>(1981), 일본 문화 금지 당시 불법 복제로 인기를 끌었던 <담뽀뽀>,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예술 세계의 정수를 담은 것으로 평가받는 애니메이션 <천사의 알>(이상 1985) 등이 4K 리마스터링, 국내 최초 개봉 등의 명목으로 스크린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의 <석류의 빛깔>(1969)은 좀 더 특별한 경우다. 2008년 개봉 당시보다 지난해 재개봉하면서 더 많은 관객을 모은 <더 폴>의 타셈 싱이 <석류의 빛깔>을 인생 영화로 꼽고 본인의 작품에 오마주 형태로 여러 번 반영한 사실이 알려졌다. 타셈 싱 외에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완벽한 영화라고 극찬했고 아리 에스터는 <미드소마>(2019)를 만들면서 참조했고, 마틴 스코세이지는 복원판 제작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석류의 빛깔> 스틸 컷 / 사진출처. IMDb
이에 <더 폴: 디렉터스 컷>의 수입사가 <석류의 빛깔>을 수입했고 마침 이 영화의 개봉을 응원하겠다고 타셈 싱이 한국을 찾았다. <석류의 빛깔>의 이야기를 요약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단순한 사연이 품은 상징과 은유는 난해하다. 원래 이 영화의 제목은 ‘사야트 노바’로 18세기에 활동한 아르메니아의 실제 시인 이름이다. 원제가 자취를 감추고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제목으로 변경된 건 당시 소련과 아르메니아의 관계 때문이다.
분리주의를 허용하지 않는 소련은 변방의 아르메니아 관련한 정보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고, 궁극적으로는 민족성을 고취해 독립으로 향하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 했다. 아르메니아 색채가 강한 ‘사야트 노바’의 상징성을 지우려고 정치, 사회, 문화, 민족적인 맥락을 제거한 <석류의 빛깔>로 제목을 변경했다. 아이러니하게 제목이 바뀐 배경이 영화에 오라를 덧씌우는 건 사야트 노바의 삶의 궤적 때문이다.
사야트 노바의 일생을 다루되 내면 세계에 집중하는 <석류의 빛깔>은 좌절과 실패와 같은 인간적 감정을 이미지로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영화의 첫 장면, 천 위에 올려놓은 석류에서 붉은 과즙이 흘러나오며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착각이 들도록 한다. 근데 이 과즙의 형태가 흥미롭다.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의 경계 모양으로 얼룩이 진다. 그래서 <석류의 빛깔>은 사야트 노바의 사연이되 아르메니아가 겪은 억압과 박해와 관련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석류의 빛깔> 스틸 컷 / 사진출처. IMDb
실제로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감독은 자신의 연출론에 관해 “근본적으로 슬픔, 희망, 사랑, 아름다움과 같은 이미지로 변형된 진실”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를 인지하고 <석류의 빛깔>을 보게 되면 인상적인 이미지 뒤에 숨은 아르메니아의 고초의 역사가 담겨 있다. 구체적인 형태는 아니라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감독이 의도한 연출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석류의 빛깔>이 제목인 까닭에 붉은색이 주종이기는 해도 극 중 1인 5역을 맡은 소피코 치아우레리가 입고 나오는 의상 중 파란색이 눈에 띄고 주황색의 기름진 땅의 배경이 자주 등장하는 등 세 가지 색이 전면에 등장하는 인상이다. 아르메니아의 국기는 1990년 8월에 제정되었는데 세 가지 색이 가로로 놓인 형태다. 맨 위의 빨간색은 군인들이 흘린 피를, 중간의 파란색은 아르메니아의 하늘을, 그리고 주황색은 비옥한 땅을 의미한다.
영화 <석류의 빛깔> 주인공의 파란색 의상 / 사진출처. IMDb
영화 <석류의 빛깔> 주황색의 기름진 땅 / 사진출처. IMDb
그처럼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색깔로 아르메니아가 지닌 특징을 반영하고 사진을 찍는 것처럼 아르메니아 배경에, 아르메니아 특유의 문양이 들어간 카펫에, 전통 의상에, 아르메니아 국민이 믿는 종교의 유물에, 그 사이사이 사람을 모델로 세워 아르메니아에서 유행하던 정사각형 형태의 화면비로 명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의 장면을 구성했다. 이에 얼마나 많은 감독이 영향받고 본인들의 작품에 반영했는지, 다음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석류의 빛깔> 스틸 컷 / 사진출처. IMDb
<네버 렛 미 고>(2011)의 마크 로마넥은 마돈나의 뮤직비디오 <Bedtime Story>(1994)를 만들면서 <석류의 빛깔>의 포도 밟는 장면을 그대로 따라 했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의 웨스 앤더슨 감독은 소품을 정리정돈하듯 반듯하게 놓아 사진을 찍듯이 하는 연출을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타셈 싱은 레이디 가가의 <911>(2020)과 Deep Forest의 <Sweet Lullaby>(2004) 등에서 <석류의 빛깔>을 차용했다.
[위] 영화 <석류의 빛깔>의 한 장면 / 사진출처. IMDb [아래] 마돈나의 'Bedtime Story'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 사진출처. Madonna 유튜브
언급한 작품의 공통점은 인물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거나 현실과 구분되는 환상을 묘사할 때 <석류의 빛깔>을 적극 참조한다는 점이다. 감독이 극 중 시인 사야트 노바가 마음속에서 겪는 혼란과 갈등과 같은 감정의 서사를 추상적이되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 전에 없던 이미지로 완성한 까닭이다. 촬영 대상을 앞에 두고 빛과 색깔과 배경을 활용해 영화를 찍는 행위는 다를 바가 없는데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전에 없던 영화를 만들었다.
장 뤽 고다르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에 관해 이렇게 평가했다. “영화의 사원에는 이미지와 빛, 현실이 있다. 파라자노프는 그 사원의 거장이었다.“ 또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석류의 빛깔>을 보고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에 관해 말하기를 “놀랍도록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내 생각에 이 감독은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라고 했다. <석류의 빛깔>이 세상에 나온 지 56년이 지났지만, 온전한 형태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