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도쿄 필하모닉×막심 벤게로프
지난 3일, 툴루즈 라 알 오 그랭서 공연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선보여
가을이 무르익었다. 프랑스 남서부 옥시타니 지방의 툴루즈는 보르도와 함께 이 지역의 문화 도시를 자부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 시리즈(Les Grands Interprètes de Toulouse)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올해 시즌 개막은 지난 3일 밤, 정명훈이 이끄는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가 맡았다. 프로그램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관현악 모음곡으로 구성된 러시아 레퍼토리로 구성되었다. 차이콥스키와 프로코피예프는 관현악 작품뿐 아니라 오페라와 발레 등 무대 음악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작곡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러시아 음악의 밤을 찾은 음악 애호가들로 라 알 오 그랭(La Halle aux Grains)은 가득 찼다. 라 스칼라 오페라 음악감독 임명 소식 이후 정명훈의 행보는 유럽에서도 한층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 유럽 투어는 도시마다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툴루즈 청중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공연장 주변은 공연 시작 전부터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로 붐볐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공연장을 떠나지 않고, 나오는 연주자들을 향해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도쿄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무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긴장감과 설렘을 전했다. 일사불란하게 들어서는 그들이 착석 후 악기와 보면대를 정돈하고 그들의 마에스트로를 기다리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엄격하게 훈련된 군대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여성 단원들의 수가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 콘트라베이스 파트가 모두 독일식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악단의 관현악 전통이 독일 계보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프로코피예프 발레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 관현악 모음곡이 연주된 2부에서, 도쿄 필하모닉은 격정적이고 변화무쌍한 사운드로 작품의 드라마적 성격을 극대화했다. ‘몬테규가와 캐퓰렛 가’에서는 직선적이고 강렬한 도입으로 두 가문의 첨예한 대립을 부각했고, 발코니 장면에서는 감미롭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정교하게 표현했다. 특히 클라리넷 솔로가 그려낸 줄리엣의 장난기와 사랑스러움은 잊히지 않는 백미로 기억된다.
줄리엣의 죽음 장면에서는 강렬한 불협화음이 포르테로 터져 나왔고, 이때 단원들의 활 놀림은 절규에 가까운 표현력을 보여 주었다. 악기군 별 개성이 중요한 부분일수록, 정명훈의 지휘봉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각자의 표현을 존중하면서 자발성을 유도했다. 앙코르로 연주된 브람스 헝가리 무곡에서도 도쿄 필하모닉은 정명훈의 지휘에 날카롭고도 민첩하게 반응하며 압도적인 통일감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는 다섯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 열 살에 비에니야프스키 국제 콩쿠르, 열다섯 살에 칼 플레시 국제 콩쿠르를 석권하며 일찌감치 천재로 불린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자하르 브론을 사사한 그는 이후 Melodia, Teldec, Deutsche Grammophon, Warner Classics 등 주요 레이블과의 녹음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확립했다. 그래미상과 그라모폰상을 비롯해 저명한 음악상을 수상했고 2007년부터는 지휘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Gstaad Festival Orchestra의 수석 지휘자로 활약하는 그는 최근 정명훈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콥스키 협주곡 음반을 발표해 다시 한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교육에도 깊은 열정을 지닌 벤게로프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대학과 런던 로열 아카데미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2021년에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개설해 젊은 연주자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모나코에 거주하는 그는 1727년 제작된 명기 ‘ex-Kreutzer’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탁월한 기교와 인간적 울림으로 깊은 감동을 선사하며 전 세계 클래식 애호가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1911년 창단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교향악단으로, 2011년 창단 100주년을 맞았다. 약 160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교향곡 작품뿐만 아니라 오페라, 발레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일본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2001년부터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온 정명훈이 현재 명예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안드레아 바티스토니(Andrea Battistoni)가 상임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네프(Mikhail Pletnev)가 특별 객원지휘자로 함께하고 있다.
일본 내 정기 연주회 시리즈와 오페라·발레 공연, NHK 방송 연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등, 폭넓은 활동을 이어가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도쿄 필하모닉은, 2014년 창단 100주년 세계 투어에서 뉴욕, 마드리드, 파리, 런던, 싱가포르, 방콕 등 여섯 개 도시에서 공연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또한 2015년 12월에는 서울과 도쿄에서 서울시향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연주회를 연주하여 한일 음악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