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 바트요에서 카사 밀라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면 닿을 만큼 가깝다. 그전까지 가우디가 지은 집을 마주했을 때 받은 첫 느낌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카사 밀라는 약간 특이했다. 거대한 자연의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빨리 들어가기보다 밖에서 좀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몬세라트를 옮겨 놓은 듯 수많은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집이면서도 지중해가 이동한 것처럼 파도가 일렁이고 해조류가 넘실거리는 집. 가우디가 에이샴플라에 지은 세 번째 집이자 마지막 민간 건축물인 카사 밀라는 여러모로 이전 작품들과는 달랐다. 규모 또한 제일 크다. 가우디는 어떻게 해서 이 집을 짓게 된 걸까?

카사 바트요 주인인 바트요의 아내 고도는 정치인이자 사업가인 바르토메우 고도 이 피에의 딸이었다. 그와 함께 마 사업을 했던 동업자가 바로 페레 밀라 이 캄프스의 아버지 페레 밀라 이 피다. 아버지들끼리 동업자 관계였으므로 자녀인 고도와 밀라 역시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사이였다. 밀라는 카사 바트요에 관심이 많았다. 고도의 초대를 받아 카사 바트요를 방문해 구석구석 둘러보았을 것이다. 그는 카사 바트요에 매료되었다. 자신도 그라시아 거리에 카사 바트요 못지않은 아름다운 집을 짓고 싶었다. 건축가는 당연히 가우디였다.
가우디가 에이샴플라에 지은 세 번째 집이자 마지막 민간 건축물인 카사 밀라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장식을 최대한 절제하면서도 신기술을 총동원해 건설한 최첨단 건물이다. / 사진. © 김혜경
가우디가 에이샴플라에 지은 세 번째 집이자 마지막 민간 건축물인 카사 밀라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장식을 최대한 절제하면서도 신기술을 총동원해 건설한 최첨단 건물이다. / 사진. © 김혜경
하지만 돈은 밀라가 아니라 그의 아내 로사리오 세지몬 이 아르텔스에게서 나왔다. 세지몬 역시 가우디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우디와 같은 레우스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가우디의 어머니는 음식과 옷을 얻기 위해 세지몬의 집을 방문한 적 있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그라시아 거리에서 만난 것이다. 그녀가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 데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그녀는 1892년 미국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은 주셉 구아르디올라 이 그라우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이때 그녀는 22세였고 남편은 60세였다. 이 부부는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며 호화롭게 살았다. 그러다 결혼 10년 차가 되던 1901년 남편 구아르디올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짧은 결혼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남편에게서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이즈음 세지몬은 우연히 밀라를 만났다. 청혼을 거절당했으나 밀라는 굴하지 않고 구애를 계속했다. 어느 날 밀라는 세지몬에게 흰색과 붉은색 장미꽃 두 송이를 보냈다. 그는 그녀에게 붉은색 장미를 꽂은 드레스를 입고 산책을 나오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겠다고 전했다. 얼마 후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산책을 나왔다. 가슴에는 붉은색 장미가 달려 있었다. 1905년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밀라가 구아르디올라의 과부와 결혼한 것인지, 과부의 저금통과 결혼한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카탈루냐어로 ‘La Guardiola(라 구아르디올라)’는 저금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밀라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댄디 보이로 자랐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고 삼촌은 바르셀로나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변호사와 정치가로 활동했지만, 집안의 재산을 빼면 스스로 번 돈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었고, 바르셀로나에 자동차가 들어오자마자 맨 먼저 구매해서 타고 다녔다. 그는 아내 세지몬이 가진 돈으로 그라시아 거리와 프로벤사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는 집을 사들였다. 그런 다음 가우디에게 집합 주택을 지어달라고 의뢰했다. 세지몬은 젊은 남편의 간절한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카사 밀라 건축의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가우디는 기존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카사 칼베트와 카사 바트요는 잘 짜인 블록 안에 있었기에 옆 건물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고, 같은 블록에 있는 건물들과의 조화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카사 밀라는 두 거리가 만나는 접점 지대에 있었기에 이런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파도와 바람이 머물다가는 집

건축 과정에서 가우디는 전례 없이 거친 파도와 바람 앞에서 악전고투해야만 했다.

첫 번째는 감독을 맡은 시청 공무원과의 지속적인 갈등이었다. 1905년 가을 밀라는 건축 허가를 신청했고, 1906년 봄 가우디는 도면을 제출했으나 시청에서는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가우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다. 1907년 12월 기둥 하나가 그라시아 거리 보도를 침범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시청 검사관은 인도로 삐죽 튀어나온 1층 돌기둥을 뽑아내라는 철거 명령을 내렸다. 가우디는 시공자인 주셉 바요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그 기둥을 치즈처럼 잘라버릴 거라고 해. 그리고 잘라낸 기둥 표면에 이런 글귀를 새겨둘 거라고도 일러줘. ‘이 부분은 시청의 명령으로 잘려 나갔음’ 이렇게 말이야.”
그라시아 거리 쪽으로 나 있는 주 출입문. 철제 대문의 문양은 파도가 일으키는 물거품에서 착안했다. 같은 모양 하나 없는 수많은 거석을 정밀하게 쌓아 올린 방식이 신비롭다. / 사진. © 김혜경
그라시아 거리 쪽으로 나 있는 주 출입문. 철제 대문의 문양은 파도가 일으키는 물거품에서 착안했다. 같은 모양 하나 없는 수많은 거석을 정밀하게 쌓아 올린 방식이 신비롭다. / 사진. © 김혜경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시청 검사관은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가우디는 신경 쓰지 않고 공사를 계속했다. 1908년 여름 시청에서는 건축주에게 10만 페세타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후 건축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경고장들을 쉬지 않고 보냈다. 그러다가 결국 1909년 12월 에이샴플레 특별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공사를 허가함으로써 카사 밀라의 긴 분쟁이 일단락되었다. 이들이 건축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이 건물은 다른 건물들과 구별되는 예술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시 조례를 엄격히 준수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로비를 지나면 만나는 화려하게 치장된 천장과 벽. 색채의 마술사라 불린 샤갈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중정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어우러지면 해저 동굴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 사진. © 김혜경
로비를 지나면 만나는 화려하게 치장된 천장과 벽. 색채의 마술사라 불린 샤갈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중정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어우러지면 해저 동굴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 사진. © 김혜경
두 번째는 건축주와의 싸움이었다. 가우디는 시청이 정한 건축 규정을 밥 먹듯이 어겼다. 이로 인해 엄청난 벌금을 내야 했다. 게다가 가우디의 구상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건축하다 보니 공사 기간은 길어지고 건축비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두 사람은 자주 말싸움을 벌였다. 결정적으로 건물 정면 상단에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 동상을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극심하게 대치했다. 가우디는 외벽 최상단 중앙에 마리아를 뜻하는 ‘m’과 마리아를 상징하는 장미꽃을 조각해 넣었다. 그리고 좌우 지붕 모서리마다 조금씩 글을 새겨 넣어 ‘Ave Gratia Plena Dominus Tecum’이라는 문장을 완성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계시나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건넨 인사말로 성모송의 시작 부분이다. 가우디는 카를레스 마니에게 조각상을 만들게 해서 ‘m’과 장미꽃 위쪽 부분에 세우려 했다. 하지만 밀라 부부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가우디와 세지몬은 건축가에게 줄 보수를 놓고 소송까지 벌였다. 7년 동안 이어진 지루한 법정 다툼 끝에 1916년 가우디가 승소했다. 세지몬은 가우디에게 10만 5천 페세타를 지급하기 위해 카사 밀라를 저당 잡혀 대출을 받아야 했다. 가우디는 이 돈 전액을 모자라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공사비로 봉헌했다.
외벽 최상단에는 마리아를 뜻하는 ‘m’과 장미꽃 그리고 ‘Ave Gratia Plena Dominus Tecum(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계시나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 사진. © 김혜경
외벽 최상단에는 마리아를 뜻하는 ‘m’과 장미꽃 그리고 ‘Ave Gratia Plena Dominus Tecum(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계시나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 사진. © 김혜경
세 번째는 부자들과 성직자들을 적대시하는 성난 군중과의 대립이었다. 카사 밀라 공사가 한창이던 1909년 7월 26일부터 8월 2일까지 바르셀로나에서는 이른바 ‘비극의 주간’ 사건이 일어났다. 1909년 7월 스페인 정부는 마지막 식민지인 모로코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비군 소집령을 내렸다. 그런데 동원된 사람 대부분이 가난하고 힘없는 카탈루냐인이었다. 부잣집 아들들은 돈을 내고 징집을 피해 갔다. 이 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열악한 삶의 현장으로 떠밀려가던 노동자와 도시 빈민 사이에 팽배한 갈등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분노한 군중은 바르셀로나 주요 시설을 점거한 뒤 시가전을 벌였다. 군용 열차를 중단시키고 전차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타도의 대상은 권력자와 부자들만이 아니었다. 신부와 수녀들도 증오의 대상이었다. 성직자들이 항상 부유층과 권력층 편에 서서 노동자와 도시 빈민을 외면하거나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성당과 수도원과 수녀원에 불을 지르고 성직자들의 무덤을 파헤쳤다. 군인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았으며, 거리에는 시체가 나뒹굴었다.

옥상 그리고 굴뚝의 미학

베일에 싸여 있던 카사 밀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카사 바트요를 처음 봤을 때처럼 소리를 지르며 놀라워했다. ‘라 페드레라(La Pedrera)’라는 별칭은 이때 붙여졌다. 카탈루냐어로 ‘채석장’을 의미하는 이 별칭은 육중한 돌로만 이루어진 건물의 외관을 보며 비아냥거리는 뉘앙스가 담겼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이 별칭은 소유주의 이름을 딴 카사 밀라라는 명칭을 대신하기에 이른다. 라 페드레라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어떤 만화에서는 건물을 보며 “엄마, 여기에 지진이 일어났나요?”라고 묻는 어린아이가 등장했고, 한 일간지에서는 카사 밀라를 비행기들이 머물 미래의 격납고로 묘사하기도 했다. 풍자 잡지들은 잡동사니가 들어간 노아의 방주, 벌집, 고기파이 등으로 부르며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프로벤사 거리에 면한 입구로 들어서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타원형 중정. 1층 로비는 기다랗게 연결되어 있어 걸어가면서 위를 올려다보면 두 개 중정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 사진. © 김혜경
프로벤사 거리에 면한 입구로 들어서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타원형 중정. 1층 로비는 기다랗게 연결되어 있어 걸어가면서 위를 올려다보면 두 개 중정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 사진. © 김혜경
가우디는 어떤 건물이든 소유주가 살던 2층 공간을 구성하고 꾸미는 데 정성을 다했다. 카사 밀라 역시 응접실, 기도실, 커다란 전실, 그라시아 거리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사무실, 세지몬이 이따금 치던 피아노가 놓인 살론 아술(푸른 방), 식당, 침실, 옷방, 창고 등이 잘 배치되어 있었다. 건물 바깥에서 봐도 2층 발코니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렇지만 세지몬은 가우디의 실내 디자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취향 때문인지 감정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1926년 가우디가 세상을 떠나자 세지몬은 가구와 장식을 몽땅 다른 것으로 교체해 버렸다. 내부 공사까지 벌여 가우디 손길이 닿은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홀로 지내며 1964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밀라 부부가 살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일반인에 개방되지 않는다. 카사 밀라는 철골 구조에 돌을 입혀 지었기에 외벽이 하중을 받지 않아 유연한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사진. © 김혜경
밀라 부부가 살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일반인에 개방되지 않는다. 카사 밀라는 철골 구조에 돌을 입혀 지었기에 외벽이 하중을 받지 않아 유연한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 사진. © 김혜경
3층부터 6층까지는 임대 주택이었다. 6층이 개방되어 있어 당시 부르주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유심히 볼 것은 바닥에 깔린 바다 생물로 장식된 육각형 타일이다. 카사 바트요에 사용하려고 가우디가 디자인한 양각 모티프의 이 타일은 결국 카사 밀라의 포장에 사용되었다. 자세히 보면 문어, 불가사리, 소라 껍데기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나중에 바르셀로나시에서는 그라시아 거리를 단장하면서 이 문양으로 인도 전체를 장식했다.
갖가지 바다 생물로 장식된 육각형 타일. 카사 바트요에 사용하려고 가우디가 디자인한 이 타일은 결국 카사 밀라의 포장에 사용되었고 훗날 그라시아 거리 인도에도 활용되었다. / 사진. © 김혜경
갖가지 바다 생물로 장식된 육각형 타일. 카사 바트요에 사용하려고 가우디가 디자인한 이 타일은 결국 카사 밀라의 포장에 사용되었고 훗날 그라시아 거리 인도에도 활용되었다. / 사진. © 김혜경
7층은 입주민들이 세탁실과 건조실로 쓰던 다락방이다. 붉은 벽돌로 쌓은 각기 다른 크기의 270개 포물선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고래 갈비뼈를 닮았다고 해서 ‘고래의 다락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지금 다락방은 가우디 건축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를 ‘가우디의 공간’이라는 뜻으로 ‘에스파이 가우디’라 부른다. 가우디 건축물의 평면도와 모형뿐 아니라 그가 영감을 얻은 동물 골격이나 식물 문양 등이 진열되어 있다. 카사 밀라 미니어처를 보면 가우디가 이 집을 얼마나 정교하게 건축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입주민들의 세탁실과 건조실로 쓰인 다락방. 붉은 벽돌로 쌓은 각기 다른 270개 포물선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고래 갈비뼈를 닮았다고 해서 ‘고래의 다락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 사진. © 김혜경
입주민들의 세탁실과 건조실로 쓰인 다락방. 붉은 벽돌로 쌓은 각기 다른 270개 포물선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고래 갈비뼈를 닮았다고 해서 ‘고래의 다락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 사진. © 김혜경
현재 다락방은 가우디 건축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카사 밀라 미니어처를 들여다보면 가우디가 이 집을 얼마나 정교하게 건축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사진. © 김혜경
현재 다락방은 가우디 건축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카사 밀라 미니어처를 들여다보면 가우디가 이 집을 얼마나 정교하게 건축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사진. © 김혜경
다락방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모두 여섯 개다. 밖에서 보면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이 곡선으로 교차하는 원뿔 모양의 탑이다. 가우디 건축의 꽃 혹은 화룡점정이 옥상이라면 그중 백미는 단연 카사 밀라다. 신비와 황홀히 온몸을 감싼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명산에 오른 것 같기도 하고, 머나먼 우주의 다른 별로 날아온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의 모습을 닮은 굴뚝과 환기탑들은 바르셀로나를 지키는 파수꾼들이다. 특히 황톳빛 굴뚝은 투구를 쓴 로마 병정 또는 우주인처럼 보인다. 카사 밀라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일 것이다.

가우디는 왜 그렇게 옥상과 굴뚝에 마음을 쏟았을까? 옥상은 건물의 꼭대기다. 사람의 손이 닿는 마지막 부분이다. 그 위로는 바람이 있고 햇빛이 있고 하늘이 있다. 자연이다. 자연은 곧 신이다. 인간의 영역과 자연의 영역이 만나는 곳, 인간의 손과 신의 손이 마주치는 곳이 옥상이다. 그는 눈과 비를 막아주고 보온과 단열 기능에 충실하면 됐던 옥상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이 만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굴뚝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살기 위해 불을 피운다. 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는 삶의 흔적이자 냄새다. 연기가 난다는 건 뭔가를 태운다는 것이다. 인생 또한 나를 태워 자연으로 연기를 흘려보내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사람들은 제물을 태워 연기를 하늘로 올려보냄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신의 은총을 경험했다. 굴뚝은 연기를 하늘로 올려보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장치였다.
계단 탑 중 하나는 사진 명소다. 손잡이 모양 지붕 안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보인다. 오른쪽 총알처럼 생긴 건물은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의 작품 ‘토레 글로리에스’다. / 사진. © 김혜경
계단 탑 중 하나는 사진 명소다. 손잡이 모양 지붕 안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보인다. 오른쪽 총알처럼 생긴 건물은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의 작품 ‘토레 글로리에스’다. / 사진. © 김혜경
옥상의 고요한 파수꾼들. 굴뚝과 환기탑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황톳빛 굴뚝은 투구를 쓴 로마 병정 또는 우주인 같기도 하다. 카사 밀라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다. / 사진. © 김혜경
옥상의 고요한 파수꾼들. 굴뚝과 환기탑들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 황톳빛 굴뚝은 투구를 쓴 로마 병정 또는 우주인 같기도 하다. 카사 밀라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다. / 사진. © 김혜경
유승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