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사운드’의 시간 속으로

1900년, 필라델피아의 시민들과 예술 후원가들이 함께 힘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시작은 100여명이 모은 보증금 1만 달러. 시민의 참여로 세워진 이 예술의 토대는 곧 도시의 상징이 되었고, 1912년 취임한 음악감독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끊임없는 음향 실험을 통해 ‘필라델피아 사운드’라는 전설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며 미국 최고 악단 중 하나로 자리를 확고히 했다.

악단은 새로운 시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25년 세계 최초로 전기 녹음을 시도했고, 1929년에는 처음으로 라디오 전국 방송을 진행했다. 1939년에는 디즈니의 실험 애니메이션 <판타지아>의 사운드트랙을 연주하며 클래식을 시각화했고, 이후에도 끊임없는 시도와 변화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키멜 센터.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키멜 센터.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위기의 시절, 새로운 리더

그러나 125년의 역사가 언제나 찬란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티켓 판매와 후원금이 급감하며 적자가 쌓여갔고 결국 2011년에 미국 주요 오케스트라 중 최초로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그 어려운 시절, 30대의 젊은 지휘자 야닉 네제세갱(Yannick Nézet-Séguin)이 등장했다. 발음조차 낯선 이름의 그가 2012년 정식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지역 사회 참여 확대, 청년층을 위한 멤버십 프로그램 등 다양한 마케팅을 시도했다. 동시에 현대 음악과 신작 위촉 등 다양하고 과감한 예술적 도전으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전통적인 ‘필라델피아 사운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야닉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감독이자, 몬트리올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의 종신 지휘자를 겸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와의 계약은 2026년까지 연장되었으며, 이제 오케스트라는 물론 도시 자체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이지만, 리허설과 일상에서는 단원들과의 친근한 교감, SNS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으로 ‘인간적인 리더쉽’을 보여준다. 그의 열정과 소통 능력, 그리고 젊은 에너지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필라델피아 음악 감독 야닉 네제세갱(Yannick Nézet-Séguin). / 사진 출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25~26 시즌 브로슈어
필라델피아 음악 감독 야닉 네제세갱(Yannick Nézet-Séguin). / 사진 출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25~26 시즌 브로슈어
중국의 비상 - 과감한 문화 투자의 결과

25~26 필라델피아 정기시즌의 개막은 9월 25일, 유자 왕(Yuja Wang)이 협연한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로 막을 올렸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그녀는 이번 시즌에도 어김없이 미국 주요 도시의 거의 모든 오케스트라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녀 외에도 이번 시즌 필라델피아 프로그램에는 총 7명의 중국계 연주자가 참여한다. 지난 20여년간 이어진 중국의 과감한 문화 투자는 이제 중국계 연주자들의 눈에 띄는 도약으로 그 결과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2025년 쇼팽 콩쿠르 2차 진출자 40명 중 절반인 20명(그중 14명이 중국 국적)이 중국계인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집중적 문화 투자는 이제 전 세계 클래식 음악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 성장 속도는 일개 관객의 눈에도 놀라울 뿐이다.
랑랑과 유자 왕의 프로그램 소개. / 이미지 출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25~26 시즌 브로슈어
랑랑과 유자 왕의 프로그램 소개. / 이미지 출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25~26 시즌 브로슈어
무대 위의 한국인들 - 임윤찬의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

전 세계에 불고 있는 한류의 열풍에 클래식 음악이 빠질 리 없다. 임윤찬은 지난 10월 3~5일 마린 알솝이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며 무대에 젊은 열기를 불어넣었다. 이번 공연은 임윤찬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첫 협연이었다. 필자 역시 당일 공연을 관람했는데, 한국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공연을 보러 온 팬과 뉴욕에서 내려온 노신사까지... 임윤찬을 향한 모두의 사랑이 느껴져서, 그의 뜨거운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버르토크가 생의 마지막에 쓴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사랑과 고향에 대한 마지막 감사 인사를 담은 작품으로, 스물한 살의 임윤찬은 그 깊은 사색과 감성을 놀라운 성숙함으로 표현했다.

이날 마린 알솝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 존 애덤스(John Adams)의 신작을 초연하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125주년을 기념하는 멋진 공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필라델피아의 개척 정신을 보여주는 멋진 무대였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 사진. ⓒ Shin-Joong Kim/MOC
피아니스트 임윤찬. / 사진. ⓒ Shin-Joong Kim/MOC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터줏대감, 데이비드 킴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킴은 1999년부터 25년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매 시즌 협연자로 무대에 오르는 그는 이번 시즌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198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미국의 주목을 받았던 그가 40년이 흐른 지금 이 곡을 다시 연주한다니, 세월을 담은 소리는 어떤 느낌일지 더욱 궁금해진다.

낭만주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정점에 있는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로, 언제 들어도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필라델피아를 방문할 때마다 늘 든든히 콘서트마스터 자리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그를, 이번 기회에 협연자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공연은 큰 즐거움이 될 듯하다. (2025년 2월 5~7일 공연 예정)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콘서트마스터 데이비드 킴. / ⓒ Allie Skylar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콘서트마스터 데이비드 킴. / ⓒ Allie Skylar
그리고 조성진 -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2026년 1월의 마지막 날과 2월 첫째 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연주한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각각 1934년과 1922년 미국 초연을 맡았던 작품들로, 이번 공연은 그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는 125주년 시즌의 하이라이트 무대가 될 것이다. 20세기 음악사의 전환점이 된 두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스스로의 궤적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 역사적 순간의 연장선에 협연자로 함께 하는 조성진의 모습을 보며, 한국의 클래식 음악이 세계의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조성진 공연의 프로그램 소개. / 이미지 출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25~26 시즌 브로슈어
조성진 공연의 프로그램 소개. / 이미지 출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25~26 시즌 브로슈어
끊임없이 도전하는 록키의 고향 -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는 나에게는 늘 친근하고 고마운 도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록키’의 고향이기도 하고, 버지니아에 사는 나로서는 당일치기로 공연을 보러 갈 수 있는 유일한 타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은 뉴욕과의 거리도 왕복 4시간 남짓이라, 뉴욕에서도 많이들 공연을 보러 오기도 한다.

미국의 5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필라델피아 사운드’의 전통을 지켜내고 있으며, 최고의 예술성을 유지하면서도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특징을 여전히 간직한 오케스트라. 그리고 그 무대 한가운데, 이제는 한국의 연주자들이 있다. 그들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깊은 감동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의 일상에 큰 위로가 되어주곤 한다
필라델피아 시청 전경. / 사진 출처. unsplash
필라델피아 시청 전경. / 사진 출처. unsplash
고지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