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사우스뱅크 센터 전체가 거대한 무용 전시장이었다. 6층짜리 로열 페스티벌 홀과 3층 퀸 엘리자베스 홀, 강변 테라스, 평소 출입할 수 없는 분장실과 복도까지 모두 열렸다. 이머시브 공연이 주목받는 가운데, 춤을 전시하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 선보였다. 〈우리는 달 위를 걷지 말아야 했다〉라는 무용, 설치미술, 영상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관객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체험하는 구조였다. 관객은 손목에 팔찌를 차고 번호가 매겨진 지도 한 장을 받아 든 채 각자의 길을 찾았다. 어떤 공간에서는 영상 설치를 마주했고, 다른 통로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무용수를 만나게 됐다. 공연장은 더 이상 객석과 무대를 나눈 공간이 아니었고, 관객도 무대의 일부였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테라스였다. 사우스뱅크 전체가 무용에 점령된 듯한 풍경 속에서, 템스강과 런던아이를 배경으로 시위 영상이 투사되고 있었다. 그 앞에 놓인 검은 리무진을 둘러싼 무용수들은 차 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건물 외벽에는 전시 제목인 ‘우리는 달 위를 걷지 말아야 했다’라는 문구가 적힌 천이 펄럭였다. 그 주변에서는 공연자들이 스프레이로 바닥에 문구를 썼고, 또 다른 공연자는 청소차를 몰고 와 그것을 지워냈다. 휴대전화를 든 관객이 움직임을 기록하자, 무용수 역시 휴대전화를 꺼내 관객을 촬영하며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관객과 공연자’라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장면 속에서 서로를 기록하는 또 다른 행위자가 된 것이다. 거리의 행인들까지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 공간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무용 작품이 되었다.
<우리는 달 위를 걷지 말아야 했다> 공연 장면. / 사진. ⓒ (LA)HORDE/Ballet national de Marseille and Rambert at the Southbank Centre/Hugo Glendinning
테라스 공연을 지켜보다가 다른 작품도 궁금해서 퀸 엘리자베스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자욱한 로비에는 이미 관객들이 빽빽이 서 있어서 무용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빈틈을 찾아 헤맸지만 포기하고, 몇몇 사람들을 따라 바에 줄을 섰다. 맥주 한 잔을 사서 창가에 기대어 서 있는데, 갑자기 스태프들이 공간을 확보하더니 곧 남녀 무용수가 나타나 격렬한 움직임을 펼쳤다. 음악도 무대도 없는 로비 바닥에서 무용수들은 구르고 튀어 오르며 공간을 장악했다. 관객 사이에서 시작된 공연이 끝나자마자 무용수는 사람들 틈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이 작품이 〈룸 위드 어 뷰(Room With a View)〉라는 작품의 일부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지금 이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품의 제목이 무엇인지, 안무가가 누구인지 찾아보려다 곧 그만두었다. 그 순간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머무는 것이 충분히 흥겨웠으며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이처럼 설치작품과 영상, 그리고 무용 공연이 모두 24곳에서 보여지며 곳곳에서 예기치 않게 새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작품은 약 20분 단위로 반복되었기에 놓쳤다 해도 다시 기다리면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장면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 대신, 피자를 사 먹거나 맥주를 즐기다 불현듯 다가오는 순간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이 여유 속에서 만들어낸 춤을 즐기는 경험이야말로 이 전시의 본질이었다.
<우리는 달 위를 걷지 말아야 했다> 공연 장면. / 사진. ⓒ (LA)HORDE/Ballet national de Marseille and Rambert at the Southbank Centre/Hugo Glendinning
이 야심 찬 프로젝트의 주역은 프랑스의 라 오흐드((LA)HORDE)와 마르세유 국립발레단, 영국의 램버트 무용단이었다. 라 오흐드는 2013년 파리에서 결성된 창작 그룹으로, 클럽 문화와 인터넷 밈, 거리의 움직임을 무용 언어로 확장하며 대중문화와 예술을 넘나드는 작업을 해왔다. 뮤직비디오, 패션 광고, 마돈나의 투어 안무까지 영역을 넓힌 이들은 2019년 프랑스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발탁되며 전통 발레단이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램버트는 1926년 창립된 영국 무용단으로, 발레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시대마다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며 현대무용을 대표하는 단체가 됐다. 이번 협업은 실험적 그룹과 대표 무용단, 국립발레단이 한자리에 모인 사례였다. 전에도 협업은 있었지만, 설치와 영상까지 아우르며 건물 전체를 점령한 이번 규모는 이례적이었다. 무용수뿐 아니라 DJ, 학생, 커뮤니티 참여자까지 약 80명이 합류했고, 램버트 소속 한국인 무용수 김성민도 함께했다.
<우리는 달 위를 걷지 말아야 했다> 공연 장면. / 사진. ⓒ (LA)HORDE/Ballet national de Marseille and Rambert at the Southbank Centre/Hugo Glendinning
다른 배경의 무용수들이 같은 동작을 반복할 때 차이는 오히려 새로운 힘으로 바뀌었다. 질주해 몸을 던지고 상대를 들어 올리는 순간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신뢰의 몸짓이었다. 관객은 긴장과 해방을 동시에 맛봤고, 반복되는 리듬은 차이를 넘어선 에너지로 확장됐다. 무대 위의 움직임은 발레에서 거리 문화, 인터넷 밈, 점프 스타일까지 넘나들며 현대무용의 폭넓은 가능성을 드러냈다. 섬세한 몸짓과 폭발하는 에너지는 다양성이 응축된 아름다움으로 이어졌다.
무대의 다양성은 객석에도 반영됐다. 휠체어 이용자, 지팡이에 의지한 관객, 휴대전화로 기록하는 사람, 술잔을 든 이까지. 서로 다른 몸과 속도, 각기 다른 관람 방식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며 살아 있는 전시장 같은 풍경을 만들었다. 집중을 강요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다른 리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전시의 본질을 드러냈다.
<우리는 달 위를 걷지 말아야 했다> 공연 장면. / 사진. ⓒ (LA)HORDE/Ballet national de Marseille and Rambert at the Southbank Centre/Hugo Glendinning
〈우리는 달 위를 걷지 말아야 했다〉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였다. 하나의 공연이 아니라, 극장 전체를 열어 공간을 작품으로 삼은 과감한 시도이자 대규모 투자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반클리프 아펠의 후원 프로그램 ‘댄스 리플렉션즈’와 예술가들에게 건물을 통째로 내어준 사우스뱅크 센터의 결정이었다. 이는 규모 면에서도 압도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관객에게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무용·설치·영상이 교차하는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만의 체험을 만들어가는 경험, 바로 그 과정이 이 전시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이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한 〈룸 위드 어 뷰〉는 오는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폭발적인 에너지가 돋보이는 반복적이고 집단적인 움직임이 서울 무대에서 어떤 모습으로 해석될지 기대를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