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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국민 화가
얀 마테이코(Jan Matejko)
얀 마테이코(Jan Matejko)
그의 이름은 스탄치크(Stanczyk). 기막힌 유머 속에 날카로운 풍자, 현실을 꿰뚫는 조언을 담아 ‘폴란드 역사에서 가장 지혜로운 광대’로 불리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깊은 고뇌가 떠올라 있습니다. 공연을 마친 뒤의 피로감 때문은 아닙니다. 나라의 미래에 대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테이블 위 편지에는 동쪽의 요충지가 러시아군에 함락됐다는 소식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 연회에서 축하하는 작은 승리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는, 폴란드에 치명적인 손실입니다. 하지만 무도회장에 있는 왕과 귀족들은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1승 1패면 잘한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스탄치크는 이런 태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직감하고 있습니다. 망국(亡國)입니다. 그리고 그의 걱정은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폴란드는 이후 거듭된 패배로 영토를 계속 잃고, 200여년 뒤에는 세계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폴란드인은 바로 이 ‘예술의 무력감’을 그린 화가를 통해 민족을 지켜냈습니다. 사라진 조국의 정신을 그림에 남겨 마침내 독립의 불씨를 되살려낸 화가, 얀 마테이코(1838~1893). 마테이코와 그의 조국 폴란드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면
사실 폴란드는 우리에게 특별히 친숙한 나라는 아닙니다. 중부유럽을 여행할 때 근처 오스트리아와 체코는 들러도 폴란드는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폴란드 역사는 더더욱 생소합니다. 세계사를 배울 때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폴란드의 역사는 한국과 닮은 점이 꽤 많습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위치, 외세의 잦은 침략과 수난이라는 점에서요.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습니다. 계속된 주변 국가들의 침략으로 국가의 기초 체력은 약해졌고, 지도층인 귀족들은 각자의 이권을 챙기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 사이 주변의 독일(프로이센)과 러시아(러시아 제국)은 급성장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 폴란드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주변의 강대국들이 폴란드의 땅을 멋대로 나눠 가지는 ‘폴란드 분할’ 사건이었습니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냉정한 힘의 논리만이 작동하는 곳. 다른 나라의 침묵 속에서 폴란드는 세 차례에 걸쳐 영토를 모조리 빼앗겼고, 1795년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123년에 걸친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화가 마테이코는 바로 이 암흑의 시대 한복판인 1838년,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라가 사라진 지 40여년, 러시아에 맞선 독립운동(11월 봉기)이 처참히 진압된 다음이었습니다. 수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처형당하거나 망명을 떠났고, 폴란드 전역은 깊은 절망과 패배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형의 죽음, 운명을 결정짓다
어릴 때부터 마테이코는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의 운명은 이런 재능과 시대의 비극이 만나면서 결정됐습니다. 첫 번째 계기는 마테이코가 불과 여덟 살 때 찾아왔습니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독립운동(크라쿠프 봉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본 겁니다. 희망에 부풀었던 시민들이 쓰러지고 도시가 불타는 모습은 어린 소년에게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목숨을 잃은 이들 중에서는 독립운동에 뛰어든 마테이코의 형도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가족과 이웃의 죽음. 비록 소년이었지만, 마테이코의 마음속에는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뭔가를 그려야겠다’는 막연한 결심이 자리 잡았습니다.
청년이 된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1863년 러시아에 맞서는 독립운동(1월 봉기)이 또다시 일어난 겁니다. 애국심에 불타던 마테이코는 당장 전장으로 달려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마테이코의 천재성을 아까워하며 그를 말렸습니다. “네가 만약 싸우다 죽으면 그건 우리나라에 너무 큰 손해야. 그림을 그려. 그게 너의 임무야.”
하지만 이번에도 독립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수많은 동포가 죽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갔습니다. 마테이코는 그 모습을 보며 깊은 슬픔과 부채감을 느꼈습니다. ‘전장에서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간 동지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평생 폴란드의 역사를 담은 그림을 그려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이 좋구나. 값을 좀 깎아 주게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는 마테이코의 황제. 그를 거역한다면 언제든지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판매할지언정, 가해자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었습니다. “폐하, 제 그림은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테이코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결국 황제는 제값을 모두 치르고 그림을 가져갔습니다.
붓으로 하는 독립운동
당시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던 나라들은 단순히 영토만 지배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학교에서 폴란드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걸 금지했고, 대신 자신들의 역사를 주입하며 폴란드 민족의 기억을 아예 지우려 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마테이코는 이 전쟁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라져가는 역사를 캔버스에 영원히 남기는 기록자. 그게 마테이코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가 됐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작은 소품 하나까지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갑옷과 옷감, 가구를 구하기 위해 폐허가 된 성과 낡은 교회를 뒤졌고, 골동품 시장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심지어 그림 속 인물이 입을 옷을 직접 디자인해 모델에게 입혀보고 그릴 정도였습니다. 침략자들이 “너희의 역사는 없다”고 말할 때, 그는 완벽한 그림으로 진짜 역사를 보여줬습니다.
마테이코는 이미 폴란드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는 민족 화가였습니다. 그의 대표작 ‘그룬발트 전투’가 처음 공개됐을 때는 폴란드 전역에서 수만 명의 인파가 그림을 보기 위해 크라쿠프로 몰려들었습니다. 너무 사람이 많아 질서 유지를 위해 특별 경비대가 배치됐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신문들은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기도를 올렸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는 잃어버린 폴란드의 영광을 기억하며 미래의 독립을 기원하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당연히 폴란드를 지배하는 나라들은 마테이코를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은 거장을 섣불리 탄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테이코의 전략도 영리했습니다. 그는 자기 대표작을 적극적으로 기증했습니다. 독일(프로이센) 위에 군림했던 폴란드의 역사를 그린 ‘프로이센의 경의’를 완성한 뒤 크라쿠프 시의회에 기증한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로서 그의 작품은 개인이 함부로 팔거나 훼손할 수 없는, 나라 없는 민족의 국보가 되었습니다.
훗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는 마테이코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 우리 영혼 속 영광의 기억만은 빼앗을 수 없다. 마테이코는 바로 그 기억을 우리에게 되돌려줬다. 그의 캔버스는 우리 민족의 심장이 뛰는 곳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
판매했다면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었을 대작들을 기증했기에 마테이코는 늘 가난했습니다. 조국을 그리는 데 모든 걸 바친 대가로 남은 것은 지독한 가난, 그리고 과로로 생긴 병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자화상에는 5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늙고 지친 한 남자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개인이 홀로 짊어지는 것은 그만큼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불태워버린 듯한 얼굴 속에서도, 그의 눈빛만큼은 꺾이지 않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마테이코가 죽고 25년이 흐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폴란드는 123년 만에 기적처럼 독립을 되찾았습니다. 물론 마테이코의 그림 덕분에 폴란드가 독립했다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입니다. 독립은 수많은 이들의 피와 희생, 그리고 절묘한 국제 정세와 행운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마테이코가 평생에 걸쳐 지켜낸 ‘우리는 위대한 민족’이라는 기억과 자부심이 없었다면, 폴란드인들이 하나로 뭉쳐 독립을 쟁취하기는 더 힘들었을 겁니다.
폴란드라는 이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마테이코가 남기고 간 것들은 영원히 힘을 발휘할 겁니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국보급 유물을 해외로 대피시킬 비상 계획을 세웠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계획의 맨 앞줄에 있는 게 바로 마테이코의 그림들입니다. 150여 년 전 폴란드를 지켰던 캔버스는 지금도 국가의 영혼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보루입니다.
한 나라의 영토와 주권은 빼앗을 수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 기억과 자부심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맨 처음 보여드렸던 그림의 광대 스탄치크는 예술의 무력감에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그린 화가 마테이코는 반대로 증명해냈습니다. 때로는 가장 연약해 보이는 문화와 예술이,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아 모든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번 기사는 Jan Matejko(Wszystkim Znany 지음), FT 기사 ‘Poland readies art evacuation plans in case of Russian invasion’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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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