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은 전 세계 발레 팬들에게 성지와도 같다. 작곡가 차이콥스키 음악과 마리우스 프티파의 안무가 함께 한 명작이 잉태된 곳이기 때문이다. 세계 예술사에 큰 획을 그어 온 발레단에,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 7월 마린스키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안드리안 파데예프(48). 그는 지난 30여년간 무용수, 교사, 리허설 디렉터로 활동하며 마린스키의 역사를 몸에 새긴 인물이다.
안드리안 파테예프 / 사진. ⓒMikhail Vilchuk, Mariinsky Theatre
안드리안 파테예프 / 사진. ⓒMikhail Vilchuk, Mariinsky Theatre
지난 16일 파데예프 감독은 한국 언론과 첫 단독 인터뷰에 응했다. 마린스키 신관에서 만난 그는, 마린스키발레단의 한국인 수석무용수 김기민, 최근 발레단에 입성한 전민철 등과의 인연을 비롯해 예술감독으로서 책임감, 러시아 발레의 전통과 미래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파데예프는 1995년부터 2011년까지 발레단의 간판 무용수로 활약했다. '잠 자는 숲속의 미녀'와 '백조의 호수' 등 대표적인 고전 레퍼토리는 물론, 윌리엄 포사이스, 롤랑 프티와 같은 현대 안무가들의 작품까지 섭렵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그가 가장 깊이 기억하는 순간들은 모두 마린스키 무대에서 이뤄졌다.

"이 극장에서 저의 커리어가 완성됐어요. 수많은 파트너와의 작업, 뛰어난 스승들,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매일같이 마주했던 시간은 제 삶의 원동력이 됐지요." 그는 1년 전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전통의 한복판에 섰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함께.
마린스키 극장 / 사진. © Valentin Baranovsky, Mariinsky Theatre
마린스키 극장 / 사진. © Valentin Baranovsky, Mariinsky Theatre
무용수로 커리어를 접기 직전, 그는 마린스키발레단에 막 입단한 한국인 김기민을 마주했다. 김기민은 한국인 발레리노로는 최초 입단해 지금까지 러시아 최고 권위의 무대에서 활약중인 무용수다. "(김기민은) 입단 초기에도 매우 인상적인 존재였다"는 게 파데예프의 회고였다. "제가 은퇴를 준비하던 시기, 김기민의 스승(블라디미르 킴)이 제게 직접 연락해 '이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했어요. 김기민은 이미 무용수로서 신체와 긴장을 다스릴 줄 아는 준비된 무용수였죠. 지금은 유능하고 근면한 데다 내면을 잘 이끌어내는 진정한 예술가가 됐습니다." 김기민이 발레를 스포츠가 아닌 예술로 만드는 요소를 갖춘 무용수라는 게 그의 평가다.

파데예프는 또 하나의 한국인 무용수를 눈여겨 보고 있다. 지난달 러시아로 건너 와 17일 바야데르'의 남자 주역 솔로르를 꿰찬 전민철. 3막의 대형 작품 주역으로 그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너무 섣부르지 않냐'는 반응도 있다. 하지만 파데예프 감독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전민철은 이 작품을 한국에서 이미 경험했어요. 유니버설발레단 무대에 섰던 모습을 비디오로 봤고, 그의 데뷔를 미룰 이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리스크가 따르는 결정이라는 것도 그는 잘 안다. "예술 감독으로, 또 그의 스승으로 책임을 나눠가지자고 했어요. 무대를 경험하는 것만큼 값진 일은 무용수에게 더 없습니다. 무용수는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기 위해 존재합니다.
안드리안 파테예프 / 사진. ⓒMariinsky Theatre, Alexander Neff
안드리안 파테예프 / 사진. ⓒMariinsky Theatre, Alexander Neff
'찰나의 예술', '젊음의 예술'로 불리는 발레. 신체적 전성기를 발휘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파데예프는 무용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길어야 20년입니다. 어떤 예술가로 남을지 판가름나는 기간이 짧은 편이죠. 입단후 5년은 기본기를 다지는 시기이고 그 후 10년이 무용수로서 절정을 사는 황금기지요. 그 후 5년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무대를 내려올 시기를 준비합니다."

파데예프는 자신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넘어서는 무용수였다고 했다. 그에게 도전적인 과제는 복기된 마린스키발레의 초연 버전의 작품에 서는 일을 비롯해 부상을 딛고 일어서는 일 등 수도 없이 많았다고. "'돈키호테'로 순회 공연을 할 때였어요. 미국 케네디센터에서 무릎 부상을 입었습니다. 부상을 입었던 곳에 회복한 뒤 돌아가 만회하고 싶었습니다. 얼마 뒤 그곳에 다시 가서 '지젤'의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어요."

수많은 무대를 경험한 그가 선배 무용수로서 마린스키 무용수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무엇일까. "테크닉은 기본입니다. 푸에테(회전)를 몇 번 돌고, 다리를 얼마나 높이 들어올리는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대 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 눈빛까지 발레에 깃들어야 합니다. 또 관객과 상호작용도 무용수에게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를 위해 그는 무대 분장부터 의상 핏, 움직임 하나까지 철저하게 지도한다. "극장의 법칙이란 게 있어요. 무대 위 예술가는 단순히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연기자이자 해석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안드리안 파테예프 / 사진. ⓒMariinsky Theatre, Alexander Neff
안드리안 파테예프 / 사진. ⓒMariinsky Theatre, Alexander Neff
마린스키발레단이 특별한 건, 매일같이 이뤄지는 대작의 향연에 더해 발레단의 역사를 기록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동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파데예프는 지난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발레 스타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의 추모 갈라, 올해 99세를 일기로 영면한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 헌정 공연도 마린스키극장에서 진행했다. "쉬클리야로프는 재능도 뛰어났고 많은 관객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생일(2월 9일)에 진행된 갈라 공연은 2시간만에 매진될 정도였죠. 그리고로비치는 한 시대를 만들었고, 그의 시대가 저물지 않은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 석화(1957)와 사랑의 전설(1961)은 여전히 사랑받는 레퍼토리에요. 그리고로비치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예술가가 됐고 볼쇼이 극장으로 옮겨 자신만의 재안무 버전을 통해 세계의 발레단에 많은 영향력을 준 위인입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싶은 관객들에게 갈라 무대로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에는 마린스키(상트페테르부르크)와 볼쇼이(모스크바)라는 세계적인 두 발레단이 존재한다. 파데예프는 “두 단체는 완전히 다르지만, 러시아 발레 전통이라는 공통된 뿌리를 갖고 있다”고 했다. “마린스키는 고전 발레의 중심입니다. 프티파의 원전이 탄생한 극장이기도 하죠. 반면 볼쇼이는 규모가 크고, 드라마틱한 해석이 특징입니다. 서로 경쟁하면서도 건강한 예술적 자극을 주고받는 관계예요.” 발레단이 상주하고 있는 각각의 극장은, 발레리 게르기예프라는 인물이 극장장(총감독)을 겸하고 있다. 게르기예프의 겸임으로 두 극장 상주 예술단체는 더욱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 사진. ⓒ이해원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 사진. ⓒ이해원
그러면서도 파데예프는 마린스키 극장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다양한 예술 장르가 공존하는 집합체'라는 점을 꼽았다. 그는 "오페라, 오케스트라, 연극 등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하면서 발레 해석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러시아 발레는 한국 발레계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쳐왔다. 이에 파데예프는 두 나라의 교류에 대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마린스키발레단은 한국이 발레를 잘 이해하는 나라라고 여깁니다. 이미 김기민, 전민철이라는 훌륭한 무용수를 한국에서 받아들였고, 이것이 러시아 발레가 한국 발레에 기여한 증거이자 미래 교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