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존 필드의 음악을 더 많이 발견했으면 해요. 만약 당신이 뭔가를 느꼈거나 저와 공유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저도 볼 수 있게 SNS에 올려주세요. 전 주로 인스타를 써요.”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알리스 자라 오트가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공연에서 프로그램으로 준비한 레퍼토리를 모두 마친 뒤 이렇게 말하자 관객들이 웃었다. 오트는 독일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1988년 태어난 독일 피아니스트다. 2008년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활발한 녹음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의 내한 공연은 2006년 이후 19년 만이다. 이날 오트는 존 필드의 야상곡, 베토벤 소나타를 번갈아가며 16곡을 연주했다.

“필드는 야상곡의 아버지”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모든 에너지를 연주에 온전히 쏟는 음악가들이다. 이들은 관객 호응에 맞추기보다는 완벽한 연주를 들려주는 데 집중한다. 해외 투어에 자신의 피아노를 따로 챙기는 것으로 알려진 크리스티안 짐머만이 이쪽에 가깝다. 반대편엔 관객과의 소통에도 힘쓰는 음악가들이 있다. 음악 접근법을 공연 중 관객들에게 말로 알려주는 경우다. 이날 오트는 네 차례나 마이크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아일랜드 작곡가인 필드의 매력을 알려주기 위해 그는 ‘필드 전도사’를 자처했다.

맨발로 나타난 오트는 피아노에 앉자마자 연주를 시작했다. 첫 곡은 밝은 선율이 두드러지는 필드의 야상곡 17번. 속도감이 뚜렷한 연주였다. 지난 2월 그가 앨범으로 내놨던 녹음본과 비교하면 더 그랬다. 첫 곡을 끝내자마자 오트는 베토벤 소나타 19번을 밀어붙였다. 섭씨 37도의 무더위와 때아닌 폭우에 지쳤을 관객들을 위해 일부러 경쾌한 음조를 띄우려는 듯했다. 통상 연주에 11분이 걸리는 두 곡을 그는 9분 만에 소화했다. 연주를 마친 오트는 한국말로 “좋은 저녁입니다”라고 인사한 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영어로 필드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입은 미색 카디건이 의자를 덮다 못해 바닥에 닿았다.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오트는 필드를 “야상곡의 아버지”로 불렀다. 야상곡 하면 보통은 쇼팽을 떠올리곤 한다. 필드는 쇼팽보다 28년 빠른 1782년 태어났음에도 현대에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트도 “피아노를 배울 땐 필드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오트는 코로나19 유행으로 공연이 어려웠을 때 우연히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접한 필드의 노래에 빠지게 됐다. 오트는 “필드의 야상곡 17번은 활기차면서 재치있는 곡으로 베토벤 소나타 19번과 아주 비슷하다”며 선곡 이유를 설명했다.

베토벤과 쇼팽 사이엔, 필드

오트는 필드의 초기작인 야상곡 1·2·4번을 차례대로 연주했다. 야상곡 1번에선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음량을 키웠다가 줄이기를 부드럽게 반복하며 청중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담담한 야상곡 2번은 수묵화 같았다. 감정 표현이 뚜렷한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너무 선명하지도, 너무 희미하지도 않은 음들을 끊임없이 퍼뜨리며 먹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야상곡 4번에선 필드의 매력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베토벤 소나타가 단단하고 조밀한 느낌이었다면 필드의 야상곡은 수수하다가도 중간중간 감정이 분출되는 인상이었다. 달리는 기차 창밖으로 멋진 경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장면 같았다. 감정 표출이 분명한 쇼팽의 야상곡과 비교하면 한결 담백했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오트는 “필드는 애주가로 샴페인과 코냑을 좋아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40대에 생애를 마친 그의 건강에 음주가 해가 됐다고. 그의 말솜씨에 관객들이 익숙해져 갈 즈음 오트는 필드의 야상곡 10번과 베토벤 소나타 30번을 연주했다. 오트의 설명대로 야상곡 10번의 끝 음과 소나타 30번의 첫 음이 같아 두 곡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나타 30번 2악장에선 남성 피아니스트에게서 기대할 만한 힘찬 타건을 볼 수 있었다.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2부는 유려한 선율을 뽐내는 필드의 야상곡 14번이 시작이었다. 다음 차례였던 야상곡 16번은 이전 곡들보다 에너지가 넘쳤다. 오트는 잔잔함을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음들을 폭발하듯 쏟아내곤 했다. 겉으론 평온한 대지 같지만 들여다보면 균열 속에 용암이 끓는 모습 같았다. 평온함이 두드러졌던 녹음본과는 달리 생동감이 곳곳에서 솟아났다. 연주는 경쾌하면서도 짧은 음을 살며시 누르는 위트로 끝났다. 갑작스럽게 귀여운 소리에 관객석에선 살짝 웃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월광은 로맨틱한 곡 아니에요”

마지막 레퍼토리는 필드의 야상곡 9번과 ‘월광’으로 알려진 베토벤 소나타 14번. 본격적인 연주에 앞서 오트는 이들 곡의 하이라이트를 미리 들려주며 관객들에게 두 멜로디의 유사성을 확인시켰다. 선율은 비슷하지만 “필드가 월광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월광이 곡명처럼 “로맨틱한 풍경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돈 조반니가 코멘다토레를 마지 못해 죽이는 장면에서 베토벤이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인 만큼 월광은 장송곡의 면모가 분명하단 얘기였다.

오트가 연주한 월광 1악장도 감미롭기보단 장례식을 떠올릴 정도로 음울한 쪽에 가까웠다. 선율을 이끄는 그의 오른손은 고인에게 발문을 읊조릴 때처럼 터져나오는 슬픔을 절제하려는 듯 연주했다. 이와 반대로 격정적이었던 마지막 3악장은 이날 무대의 하이라이트였다. 오트는 쫓아 달려오는 음표들을 피하려는 것처럼 숨 쉴 틈 없이 관객들을 몰아세웠다. 화음을 낼 땐 스네어 드럼을 두드리듯 건반을 때렸다. 비통함이 가득한 연주가 절정에 이르자 오트는 맨발 발꿈치로 무대를 때렸다. 마룻바닥이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가 났다.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연주를 마친 오트는 객석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3초간 숙였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했던 격렬한 연주와 대비되는 극적인 공손함이었다. 열연을 본 관객들의 환호는 당연했다. “음악은 우리가 서로를 살피고 귀담아 듣도록 한다”고 한 오트의 말엔 음악으로 관객과 교감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집약돼 있었다. 앙코르 곡으론 패르트의 ‘알리나를 위하여’를 골랐다. 열대야가 무색할 정도로 얼음 위를 걷는 듯한 차가운 선율이었다. 건반에서 손을 떼기 직전 그는 고개를 들어 홀 천장을 5초 정도 쳐다봤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는 듯한 그 자세에 객석도 숨을 죽였다. 이윽고 오트가 객석으로 고개를 돌려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관객들도 음악으로 포근해진 마음을 담아 화답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알리스 자라 오트. / 사진출처. 마스트미디어. ⓒ Rowan Lee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