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개봉 당시에는 저조한 관심과 흥행에 머물렀던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작년 연말에 재개봉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운이 좋게도 2008년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던 필자는 영화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이걸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당시 스크린에 등장하는 장면들에 넋을 놓아 영화의 내용도 모르는 채 관람을 마쳤고,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몇 년 뒤, OTT 플랫폼에서 다시 이 영화를 보았을 때였다.
찬드바오리 / 사진. ⓒGerd Eichmann, 출처. 위키피디아
이 영화가 유명한 이유는 CG 보다도 더 CG 같은 느낌을 주는 실제 촬영지들 때문이다. 감독 타셈 싱(Tarsem Singh)은 이 영화를 위해 17년 동안 세계각지의 명소들을 찾아다녔고, CG 사용 없이 실제로 촬영한 경이로움을 스크린 위에 펼쳐놓았다. 그 결과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어려운 장면들이 완성되었고 관객들은 이 경이로움 앞에 속수무책 없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주인공이 한 소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계획되지 않은 이야기 속 모험의 장소들을 소녀가 상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따지면 현실보다는 환상의 영역에 더 가깝다. 이를 위해 영화에는 인도 조드푸르의 푸른 도시, 히말라야의 판공초,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식물원 등 전 세계 24개국의 명소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시각적인 놀라움 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나비를 쫓던 원숭이가 총을 맞아 떨어진 곳, 무수한 삼각형의 반복으로 형성된 공간의 등장이었다.
찬드바오리 / 사진. ⓒGerd Eichmann, 출처. 위키피디아
이 기묘한 공간은 인도 아바네리 지역에 위치한 ‘찬드바오리’ 계단식 우물이다. 약 30미터 깊이의 공간을 세 면에서 감싸는 3500여 개의 계단이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지만, 이곳은 오히려 주민들의 실생활과 깊게 연결된 장소이다. 강수량의 계절적 편차가 극심한 인도 북서부 지역에서는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물의 확보를 위해 땅을 깊게 파고 석재를 활용하여 계단 벽을 만듦으로써 지하 우물과 여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동시에 달성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수위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수위가 낮아져도 계속해서 우물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곳은 식수, 세탁, 목욕, 농사 등 다양한 영역에 활용된 물을 제공하는 장소였을 뿐 아니라 지상과의 깊이 차와 석재로 둘러싸인 공간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더위를 피하기에 좋은 장소가 되기도 했다.
찬드바오리 / 사진. ⓒDoron, 출처. 위키피디아
찬드바오리는 동일한 형태와 규격의 계단만을 이용하여 지상부터 지하까지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이렇게 일정한 형태의 도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평면을 채워나가는 방식을 테셀레이션(tessellation) 이라고 한다. 삼각형이라는 기본 도형이 집요하게 반복되는 찬드바오리를 계속 보고 있으면 어지러울 정도인데, 이는 테셀레이션 방식으로 형성된 패턴이 마치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우리의 뇌는 선들이 교차하며 생기는 효과를 움직임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도형의 배열을 재해석하려고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시효과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공간을 상상으로 구현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으로 유명한 인물로 에셔 (M.C.Escher)가 있으며, 찬드바오리를 보며 그의 작품인 'Convex and Concave'(1955)가 떠오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Convex and Concave>(1955)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장소들은 단지 경이로운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움직임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광활한 장소에서 가만히 서 있는 인물들이 발밑으로 반사되며 수직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그들의 서 있음을 부각시키고, 인물들이 빙글빙글 도는 장면에서는 장소의 형태와 패턴 모두 원형을 기본으로 하는 곳이 선택되었다.
찬드바오리에서는 검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쓴 동일한 모습의 병사들이 우물 밑에서 위로 한꺼번에 수직 이동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때 그 자체만으로도 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공간의 역동성이 극대화된다. 움직이는 주체는 인간이지만 벽 전체가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생기고, 수직적으로 오르고 있는지 수평적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도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공간 그 자체가 미로처럼 인식되는 경험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인 공간을 분해해 보면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인 삼각형, 그리고 삼각형의 경사를 이루는 대각선으로 환원되므로 가장 단순한 형식이 가장 복잡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속 찬드바오리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찬드바오리는 이처럼 현실의 필요로 만들어졌으나 그 형식은 사람들의 착시와 환상을 자극한다. 생존을 위해 형성된 구조가 상상의 세계에서 시각적 환영을 만들고, 반복되는 형태가 질서를 부여하는 동시에 감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어떤 공간은 그 자체로 실제이자 이미지이며 현실이자 상징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현실의 질감으로 만들어졌지만 상상의 질서로 읽히는 공간, 찬드바오리는 한 소녀가 상상 속에서 떠난 모험의 장소가 되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