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총리·대통령 속이는 러시아 유튜버
보통 사람이 국가 정상 등에게 대뜸 전화해 통화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이 안심할 정도로 속임수를 쓸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2018년 6월께 미국 백악관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자신은 민주당의 로버트 메넨데스(뉴저지) 상원의원인데, 대통령과 통화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백악관 직원은 “대통령이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약 1시간30분 뒤 콜백이 왔다. 트럼프 대통령 목소리였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힘든 시간을 겪었어요. 나는 온당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는 메넨데스 의원이 부패 혐의에서 막 벗어난 때였다. 그의 처지를 알고 있던 트럼프 대통령이 위로와 축하를 건넨 것이다. 통화에선 여러 국정 현안도 논의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통화 상대는 메넨데스 의원 목소리를 성대모사한 미국 코미디언 존 멜렌데스. 그가 얼마 뒤 팟캐스트에 통화 녹취록을 올리자 백악관도 대통령이 속았음을 인정했다.

주요국 정상을 속여 통화하고 이를 과시하는 데 능통하기로는 러시아 코미디언이자 유튜버인 블라디미르 쿠즈네초프와 알렉세이 스톨야로프만 한 이들이 있을까 싶다. ‘보반’과 ‘렉서스’라는 예명을 쓰는 이들은 최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와의 통화 녹음 파일을 온라인에 올려 또 한 번 악명을 떨쳤다. 아프리카 이민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멜로니 총리는 아프리카연합의 고위 외교관으로 가장한 이들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들 ‘듀오’의 전적은 화려하다. 올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사칭해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과 통화했다. 지난해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흉내 내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등도 속임수 통화 대상이었다.

보반과 렉서스가 각국 총리·대통령의 전화번호 등을 러시아 보안당국으로부터 제공받으며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의혹이 나온 지 오래다. 둘은 과거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도와주는 것은 합법적이다. 애국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느냐”며 의혹을 적극 부인하지 않았다. 다음 차례는 누가 될까? 주요국 정상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

류시훈 논설위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