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 정채봉(1946~2001) : 전남 순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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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읽기 참 좋은 시죠?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초심(初心)의 초(初)는 옷 의(衣)와 가위 도(刀)를 합친 것이니 옷을 만드는 시초를 뜻합니다. 처음에 세운 뜻을 이루려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초지일관(初志一貫)의 뿌리이기도 하지요.

초심을 잊지 않는다면 이루지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 이백(李白)에 따르면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지요. 이백의 어릴 때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 ‘초심불망 마부작침(初心不忘 磨斧作針)’의 고사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걸로 바늘을 만들 수 있단다”

소년 이백이 공부에 싫증 나 하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가 냇가에서 도끼를 바위에 가는 걸 보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단다.”
“도끼로 바늘을 만든다고요?”

이백이 큰 소리로 웃자 노파가 말했습니다.
“얘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이백은 크게 깨닫고 글공부를 다시 시작해 큰 시인이 됐습니다.

‘첫 마음’을 쓴 정채봉은 전남 순천의 한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광복 이듬해였으니 무척 힘든 시기였죠. 그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외롭게 자랐습니다. 내성적이고 심약한 성격 탓에 학교나 동네에서 또래 집단에 끼지도 못했지요. 혼자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는 엄마 없이 자란 외로움을 거름 삼아 동심을 노래하는 동화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마침내 이뤄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초심으로 극복했지요. 이른바 초부득삼(初不得三: 첫 번에 실패한 것이 세 번째는 성공한다)의 자세로 ‘어른을 위한 동화’ 장르까지 개척했습니다.

첫 출근 때 신발끈을 매듯 일을 한다면

그는 쉰 살이 넘어서도 동심과 초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새 나이 한 살’이라는 시에서는 ‘새 나이 한 살을/ 쉰 살 그루터기에서 올라오는/ 새순인 양 얻는다’고 노래했지요. 또 ‘시궁창 같은 마음 또한 확 엎어 버리고/ 댓잎 끝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 받아/ 새로이 한 살로 살자’고 했습니다.

오십이 되어서도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벌거숭이// 그 나이 이제/ 한 살’이라며 평생을 아이의 마음, 초심으로 살았지요. 그는 2001년 1월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먼저 떠난 어머니를 만나 ‘첫 마음’의 몇 구절을 읽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하늘 학교’의 공부를 새로 시작했을까요? 혹시 그가 ‘첫 출근 하는 날,/ 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그곳이야말로 ‘천국의 직장’일 것입니다.

그는 늘 처음 같은 ‘새 마음’을 다지면서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지는 삶의 이치를 일깨워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 초마다 그의 ‘첫 마음’을 다시 찾아 읽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