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법조인열전
(4) 뿌리 깊은 기수문화의 태동 '사법연수원 1~5기'
'계급 정년' 역할한 연수원 기수
후배 승진하면 용퇴하던 관행도
채이식, 해운분쟁서 명성 쌓아
김일수, 사시생 형법 필독서 집필
김승규·양승태는 '사돈지간' 인연
이홍훈,'일조권=환경 권' 판결
2기 정호영·조준웅, 특검 임명
김황식·정홍원 등 총리 2명 배출
검찰총장도 김각영 등 4명 나와
3기 오윤덕은 '법조계 봉사왕'
연수원은 1971년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원 직속 기구가 됐다. 연수원 교육기간은 2년이다. 사시 합격자들은 이 기간에 동고동락하면서 강도 높은 교육 프로그램을 소화한다. 남다른 유대감이 쌓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위직 판사나 검사에게 연수원 기수는 일종의 ‘계급정년’ 역할을 한다. 후배 기수가 먼저 승진하면 선배 기수는 용퇴하는 게 관행이던 시절도 있었다.
김용담, 연수원 출신 첫 대법관
연수원 1기는 모두 32명이다. 검찰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배’ 1순위로 회자하는 이명재 전 검찰총장(사시 11회)이 연수원 1기다. 그는 선후배 검사들은 물론 심지어 피의자들에게서도 인품을 인정받았다.
이 전 총장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등을 거치며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 명성그룹 사건, 5공 비리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처리했다. 지금은 법무법인 태평양의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전 총장 이외에 검찰 내 요직을 두루 거친 김경한 전 법무부 장관과 연수원 출신 첫 번째 대법관인 김용담 전 대법관도 1기다. 김 전 장관은 법무법인 세종의 대표변호사를 지냈고, 김 전 대법관은 현재 세종의 대표변호사다.
연수원 2기인 김승규 전 법무부 장관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각별한 인연이 있다. 김 전 장관은 양 전 대법원장의 서울대 법대 2년 선배지만 연수원에는 2기로 함께 입소했다. 2005년 김 전 장관의 3남과 양 전 대법원장의 차녀가 백년가약을 맺으며 사돈이 됐다. 두 사람은 1986년 제주지검 차장검사와 제주지법 부장판사로, 2000년 부산고검장과 부산지방법원장으로 같은 지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검찰 수사선에 오른 양 전 대법원장은 대학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법원행정처에서 오래 몸담아 ‘사법행정의 달인’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에 맞서 사돈 김 전 장관이 설립한 법무법인 로고스 소속 변호사들을 선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1·2기에선 법학계 거두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사시 11회 최연소이자 차석으로 합격한 채이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1기)는 해상법 전문가이자 중재인으로 국제 해운 관련 분쟁에서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2005~2009년 동양인 최초로 국제해사기구(IMO) 법률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형법학계에서는 김일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2기)가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을 지내며 형법체계 정립과 개선에 힘썼다. 그가 집필한 형법총론은 사시 준비생들의 필독서였다.
특별검사도 두 명이 나왔다. 모두 2기 출신인 정호영과 조준웅 변호사다. 판사 출신인 정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에서 일명 ‘BBK 특검(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 조작 등 범죄 혐의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에 임명됐다. 검찰에서 근무했던 조 변호사는 2007년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특검을 맡았다. 이들 특검은 소극적 수사로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국무총리 2명, 검찰총장 4명 취임
연수원 4기에서는 제41대(2010~2012년)·42대(2013~2015년) 국무총리가 연속으로 나왔다.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법조계에 발을 들인 김황식 전 총리는 뒤늦게 관운이 트였다. 그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때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대법관 임기 6년 중 3년여를 남겨놓고 감사원장에 취임했다. 2년 뒤엔 행정부 서열 두 번째인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는 당시 정홍원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이 초대 총리가 됐다.
연수원 1~5기에서는 검찰총장이 4명 나왔다. 이명재 전 검찰총장을 필두로 김각영(2기) 송광수(3기) 김종빈(5기) 전 총장이 연달아 검찰을 이끌었다. 김각영 전 총장이 검찰 개혁을 놓고 노무현 정부와 갈등을 빚으며 물러나자 후임 송 전 총장은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강조했다. 송 전 총장 취임 후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 안희정·염동연 씨 등을 기소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김종빈 전 총장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자랐을 정도로 어려운 가정 환경을 딛고 검찰 총수에 올랐다. 그는 대검 중수부장으로 일하던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인 홍업씨 등을 구속해 유명해졌다.
이홍훈 전 대법관(4기)은 법원 조직 내 대표적인 진보 성향 인사로 현재 대법원 산하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법관을 맡아 여러 소수 의견을 냈다. 전수안 김지형 김영란 박시환 전 대법관과 함께 진보적 목소리를 많이 내서 ‘독수리 5형제’로 불리기도 했다. 환경법과 행정법 분야에 정통했던 이 전 대법관은 서울지법 남부지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면서 일조권을 헌법상 보장된 환경권의 일종으로 보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3기의 오윤덕 변호사는 법조계에서 명실상부한 ‘봉사왕’이다. 20여 년간 판사로 근무한 그는 사재를 털어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고학생들을 위한 쉼터 ‘사랑샘’을 마련해 아내와 함께 운영했다. 쉼터가 철거되면서 받은 보증금 5억원을 또다시 각종 장학회와 대학에 기탁했다. 이젠 직접 재단을 설립해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법률 지원 등에 나섰다. 법조봉사대상(2008),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상(2009), 서울변호사회명덕상(2017), 변호사공익대상(2017) 등을 받았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