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초·중반까지만 해도 LG 세탁기를 보여 달라고 하면 촌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이제는 최고 명품 세탁기로 팔리고 있다.”

세탁기와 냉장고 등 LG전자 생활가전 사업을 총괄하는 HA사업본부장(사장)에 임명된 조성진 LG전자 세탁기사업부장(56·사진)은 28일 LG 경영진 인사의 하이라이트였다. LG전자 내 첫 고졸 출신 사장인 동시에 LG그룹 전체에서도 전산 상 남아 있는 자료로는 사상 처음 고졸 최고경영자(CEO)다.

조 신임 사장은 이날 휴대폰 진동이 울릴 때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주세요”라는 자동 문자를 보냈다. 오전부터 하루 종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HA사업본부 전략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축하의 뜻을 전하려던 사람들은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LG 세탁기 컬러링’을 듣는 데 만족해야 했다. 손빨래에서 나오는 여섯 가지 동작을 형상화한 ‘식스 모션’을 노래하는 멜로디였다. LG전자에 입사해 36년간 세탁기만 연구한 그의 역작을 휴대폰 컬러링에 담아 놓았다.

그가 LG전자와 첫 인연을 맺은 건 1976년. 국내 세탁기 보급률이 1%도 안됐고 기술력이 없어 모두가 세탁기 사업부를 기피하던 때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용산공고를 졸업한 뒤 산학우수 장학생으로 입사해 선뜻 세탁기설계실을 자원했다.

세탁기 엔지니어로 출발한 뒤 이후 한번도 외도를 하지 않고 세탁기만 파고들었다. 입사 20년 만인 1995년 세탁기설계실장에 올랐다. 100% 일본 기술에 의존했던 데서 우리 독자 기술로 세탁기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공장 안에 침대와 주방시설을 마련해 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일본을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에만 150여 차례 들락거렸고 전자업체가 몰려 있는 일본 오사카 사투리까지 배웠다. 일본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몰래 생산라인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 결과 1999년 세탁통에 직접 연결된 모터로 작동하는 다이렉트 드라이브(DD)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공로로 2001년 세탁기 연구실장으로 임명되며 고졸 출신으로 사내에서 처음 별(상무)을 달았다.

임원이 된 뒤 그의 세탁기 사랑은 더 깊어졌다. 국내 드럼세탁기가 전무하던 2002년 대용량 드럼세탁기인 트롬을 개발해 돌풍을 일으켰고 세계 드럼세탁기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1월 세탁기 사업을 총괄하는 세탁기사업부장이 됐고 2006년 12월 다시 상무에서 부사장으로 한꺼번에 두 단계 올라갔다. 승진 인사가 있은 뒤 곧바로 대한민국 10대 기술상을, 이듬해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