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새누리당 '줄푸세' 초심으로 돌아가라
“민주 선거를 통해 사회가 발전하는가?” 단언하기 쉽지 않다. 민주주의의 취약점은 그 어원인 ‘democracy’에서도 나타난다. 민주주의는 ‘민중(demos)이 지배하는(crat)’ 체제다. 민(民)은 명목상의 주인일 뿐이다. 권력이 ‘민중’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원천은 ‘다수의 지지’ 그 자체다.

문제는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강이 굳이 ‘가치 지향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을 ‘정책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된다. 정책 간의 양립 가능성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바구니 계산을 종국적으로 누가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정치세계의 ‘먹튀’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 발상지인 그리스가 그 역설적 사례일 수 있다. 정치적 반사이익을 위해 국민을 현혹시키는 데 혈안이 된 여야를 보면 우리나라도 ‘먹튀의 안전지대’는 아니다.

선거는 주어진 방향으로의 ‘속도 경쟁’이 아닌 ‘방향을 선택’하는, 비유하자면 ‘스톱워치’가 아닌 ‘나침반’의 경쟁이어야 한다. 이념과 가치기반을 달리하는 정당 간의 공정한 경쟁은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치발전을 가져온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번 총선에서 여야는 ‘똑같은 방향으로의’ 속도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 쪽이 다른 쪽을 베꼈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인 복지 경쟁이 그 증거다. 새누리당의 ‘좌클릭’이 귀책(歸責) 사유다.

새누리당의 경우 ‘정체성의 포기’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새누리당 산파 역할을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그 단초다. ‘비대위’는 무소속 박원순 후보의 서울시장 당선으로 야기된 ‘정당정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비대위의 임무는 정당정치를 복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새누리당이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 기반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새누리당을 지지할 명분과 정당성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비대위는 시류에 편승했다. 원칙과 철학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다. ‘국민행복론’이 돌출됐으며, 공천을 하면서 ‘눈높이’를 빌미로 이념전사를 배제시킨 것 등이 그 방증이다.

시류에 편승한 편의주의는 자충수를 낳게 돼 있다. 엄밀한 논증이 수반되지 않은 “신자유주의가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비대위의 인기영합적 발언은 좌파지식인의 논리에 투항한 ‘치명적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여당에 의해 ‘악마화’됐다. 돌아온 것은 “여당마저 신자유주의에 따른 양극화의 폐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힐난이었다. 그러나 2009~2010년에는 지니계수와 5분위배율, 그리고 상대적 빈곤율 등 각종 지표에서 소득분배가 개선됐다. 양극화 논쟁을 일으킬 이유는 없다.

깊은 성찰 없이 분노를 쏟아내면 잘못된 인과관계를 만들어내 오도된 정책을 초래한다. 그리고 ‘생산적 담론’이 아닌 ‘파괴와 분열’의 담론으로 확대될 수 있다. ‘경제민주화, 동반성장, 재벌개혁, 부자증세, 복지확대,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은 일련의 정책 패키지로 개별적인 정책효과를 따질 겨를도 없이 무조건적인 ‘당위’로 여겨진다. 국가 개입주의와 설계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는 백안시된다.

새누리당은 ‘일자리’ 창출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러려면 노동시장 유연화와 규제완화 등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창업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척정신을 고무시켜야 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로 일자리를 만들 수는 없다.

새누리당은 이제는 ‘갑(鉀)속의 칼’이 된 ‘줄푸세’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필요한 국가 개입과 국가에의 지나친 의존은 ‘줄이고’, 거미줄 같은 규제는 ‘풀고’, 법치와 질서의식은 바로 ‘세워야’ 한다. 리더십은 여론을 좇는 것이 아닌, 여론의 향배를 국가의 발전방향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개인의 발전의지와 자조의지가 고취될 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도움’도 자발적이 된다. 국가가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당연히 민간의 활력을 이용해야 한다. ‘줄푸세’가 그 길이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 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회장 dkcho@m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