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감자꽃, 그 아름다운 비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 재 무 < 시인 >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불임의 여자.내 길고 긴 여정의/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 꽃/꽃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졸시 '감자 꽃' 부분)
시골에 사는 친구로부터 감자 한 포대를 선물로 받고 나서 한동안 우리 식구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삶아 먹고,튀겨 먹고,된장국에 넣어 먹고,국 끓여 먹고,조림 수제비 탕으로 먹고,밥으로 해먹고,전으로 부쳐 먹고 있는 중이다.
감자를 자주 먹으면서 이것저것 감자에 대한 생각이 잦아지게 됐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에는 꽃을 피우는 목적이 있다.
종족보존의 본능이 꽃을 피운다.
꽃은 그러므로 생물의 생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의 꽃들이 붉은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소 엉뚱한 발상일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것이 생리적 아픔을 색깔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열매가 생긴다.
그 열매 속에는 씨앗이 들어있다.
이 씨앗은 지상에 뿌려져 다음 해에 싹을 틔우고 싹이 자라 한 그루의 나무 혹은 한 포기의 식물이 된다.
한 생명체는 나서 자라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반복을 거듭한다.
요컨대 지구 안의 생명체는 유구한 생명의 유전 법칙을 거듭해온 것이다.
하지만 감자꽃은 다르다.
꽃이 지고 나서도 열매가 생기지 않는다.
열매가 없으니 씨앗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감자라는 생명체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유지하려면 씨앗 대신 씨감자를 따로 묻어 두었다가 심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해에도 영양 만점의 굵고 실한 감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감자꽃은 두 가지 색깔을 지니고 있다.
대개의 꽃들이 붉은색 아니면 노란색 일색인 데 반해 감자꽃은 자주색 아니면 하얀색이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은 자주색 꽃을 피우는 감자는 자주색 감자알을 땅속에 묻고 있고,하얀색 꽃을 피우는 감자는 하얀색 감자알을 땅속에 묻고 있다.
이는 자연 현상 가운데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모든 열매나 알맹이가 꽃의 색깔을 닮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감자의 생태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감자꽃과 유사한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서로 다른 현상이나 사물 간의 유사성을 토대로 표현과 진술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시문학에서는 비유의 원리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비유의 원리를 적용해 감자꽃과 가장 유사한 사람의 경우를 상정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감자꽃과 닮은 사람에는 누가 있을까? 감자꽃은 생산과는 무관한 꽃이고 그 꽃의 빛깔은 자주색 아니면 하얀색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저절로 이 꽃이 애를 낳지 못하는 여자의 비애로 다가온다.
전통적으로 하얀색은 비애의 정조를 표상해 왔고,감자꽃은 씨앗과 무관하게 피었다 지는 꽃이기 때문이다.
애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불행하다.
자발적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천형으로 인해 생긴 불임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체는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할 때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성숙한 여인이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임신과 수유를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남도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차창 밖으로 노을 속 비탈 밭에 피어있는 감자꽃들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 때 감자꽃이 문득 아름다운 비애로 다가온 것은 그 꽃에서 내가 알고 지냈던,먼 친척 여인의 불임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세계와 현상에 대해 낙관과 긍정보다는 부정과 비극의 인식에 익숙한 것이 시인의 저주 받은 숙명관인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밝고 경쾌한 것보다 어둡고 쓸쓸한 것에 먼저 마음의 눈이 가 닿는 못된 습성이 있다.
감자꽃은 아름다웠다.
노을을 받아 안은 감자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애수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세상에는 아름답기에 슬픈 것들도 있는 것이다. 서양 속담처럼 슬픔은 생의 지혜를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모든 실존의 깊이는 슬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불임의 여자.내 길고 긴 여정의/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 꽃/꽃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졸시 '감자 꽃' 부분)
시골에 사는 친구로부터 감자 한 포대를 선물로 받고 나서 한동안 우리 식구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삶아 먹고,튀겨 먹고,된장국에 넣어 먹고,국 끓여 먹고,조림 수제비 탕으로 먹고,밥으로 해먹고,전으로 부쳐 먹고 있는 중이다.
감자를 자주 먹으면서 이것저것 감자에 대한 생각이 잦아지게 됐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에는 꽃을 피우는 목적이 있다.
종족보존의 본능이 꽃을 피운다.
꽃은 그러므로 생물의 생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의 꽃들이 붉은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소 엉뚱한 발상일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것이 생리적 아픔을 색깔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열매가 생긴다.
그 열매 속에는 씨앗이 들어있다.
이 씨앗은 지상에 뿌려져 다음 해에 싹을 틔우고 싹이 자라 한 그루의 나무 혹은 한 포기의 식물이 된다.
한 생명체는 나서 자라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반복을 거듭한다.
요컨대 지구 안의 생명체는 유구한 생명의 유전 법칙을 거듭해온 것이다.
하지만 감자꽃은 다르다.
꽃이 지고 나서도 열매가 생기지 않는다.
열매가 없으니 씨앗이 있을 리 없다.
따라서 감자라는 생명체를 계속해서 보존하고 유지하려면 씨앗 대신 씨감자를 따로 묻어 두었다가 심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해에도 영양 만점의 굵고 실한 감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감자꽃은 두 가지 색깔을 지니고 있다.
대개의 꽃들이 붉은색 아니면 노란색 일색인 데 반해 감자꽃은 자주색 아니면 하얀색이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은 자주색 꽃을 피우는 감자는 자주색 감자알을 땅속에 묻고 있고,하얀색 꽃을 피우는 감자는 하얀색 감자알을 땅속에 묻고 있다.
이는 자연 현상 가운데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모든 열매나 알맹이가 꽃의 색깔을 닮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감자의 생태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감자꽃과 유사한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서로 다른 현상이나 사물 간의 유사성을 토대로 표현과 진술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시문학에서는 비유의 원리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비유의 원리를 적용해 감자꽃과 가장 유사한 사람의 경우를 상정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감자꽃과 닮은 사람에는 누가 있을까? 감자꽃은 생산과는 무관한 꽃이고 그 꽃의 빛깔은 자주색 아니면 하얀색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저절로 이 꽃이 애를 낳지 못하는 여자의 비애로 다가온다.
전통적으로 하얀색은 비애의 정조를 표상해 왔고,감자꽃은 씨앗과 무관하게 피었다 지는 꽃이기 때문이다.
애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불행하다.
자발적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천형으로 인해 생긴 불임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체는 생물학적 본능에 충실할 때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성숙한 여인이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임신과 수유를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남도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차창 밖으로 노을 속 비탈 밭에 피어있는 감자꽃들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 때 감자꽃이 문득 아름다운 비애로 다가온 것은 그 꽃에서 내가 알고 지냈던,먼 친척 여인의 불임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세계와 현상에 대해 낙관과 긍정보다는 부정과 비극의 인식에 익숙한 것이 시인의 저주 받은 숙명관인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밝고 경쾌한 것보다 어둡고 쓸쓸한 것에 먼저 마음의 눈이 가 닿는 못된 습성이 있다.
감자꽃은 아름다웠다.
노을을 받아 안은 감자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애수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세상에는 아름답기에 슬픈 것들도 있는 것이다. 서양 속담처럼 슬픔은 생의 지혜를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모든 실존의 깊이는 슬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