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평 <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2005년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일본경제의 전환점으로 기록된 한 해였다. 닛케이주가지수는 40%가 넘는 상승세를 나타냈으며,부동산 가격의 하락세도 도쿄지역을 중심으로 멈추기 시작했다. 시중은행들의 부실채권 문제도 거의 해소됐다. 지난해 일본경제의 실질성장률은 2%를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고용 사정도 크게 호전됐다. 자산 가격의 급락에 따른 극심한 금융경색 때문에 실물경제가 위축되는 일본식 장기불황은 이제 종말을 고했다고 할 수 있다. 올해에는 물가 하락이라는 디플레이션도 끝날 가능성이 높다. 향후 수년 동안 일본경제는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잠재성장률보다도 훨씬 높은 성장세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경제가 이처럼 장기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본식 시스템의 장점이 유지되는 가운데 착실한 혁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혁신의 주역이 된 것은 기업이었다. 일본 기업은 고도성장 시대에 전성기를 보였던 다각화 경영,연공서열의 고용 관행 등 일본식 경영 시스템을 혁신했다. 이러한 혁신을 통해 과잉채무.과잉인력.과잉설비 문제는 점진적으로 해소된 것이다. 일본기업의 혁신 속도는 완만한 것이었지만 15년 정도에 이르는 꾸준한 혁신의 성과가 서서히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일본제철은 6만명 정도에 달했던 종업원 수를 지명 해고 없이 1만5000명 수준으로 삭감했다. 신규채용을 줄이고 고령 근로자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잇따라 퇴사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기업의 혁신 과정에서 종신고용 관행이라는 일본식 경영의 근본은 지켜졌다. 일본 기업의 근로자들은 장기적 시각에서 스킬을 향상시키면서 강력한 팀워크로 수많은 기술적 과제를 해결해 기술 정보의 보안에도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종신고용 관행에 뒷받침된 현장 기술력이 부품.소재산업을 비롯한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강화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LCD,휴대폰,하이브리드 자동차 등에서 일본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핵심 부품이나 첨단 소재는 현장 근로자들의 개선 노력에 의해 발전해 왔다. LCD의 기초 소재로 쓰이는 필름의 경우 현장 기술자들이 오랜 경험에서 뒷받침된 기술력을 활용, 얼룩 등의 품질 문제를 해결해 경쟁력을 확보했다. 제도의 근본을 지키면서도 환경 변화에 맞게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 시스템을 개량하는 혁신 패턴은 일본정부의 정책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정부는 그 동안 장기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규제완화에 주력해 뉴비즈니스를 유도해 왔다. 금융.노동.정보통신 분야 등에서 이루어진 일본정부의 규제개혁으로 소프트뱅크와 같은 유명 IT 벤처뿐만 아니라 인력파견 회사 등 다양한 형태의 신종 기업이 탄생했다. 반면 일본정부는 장기불황에 허덕이던 중소기업을 지키기 위해 전통적인 정책 수단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중소기업에 대한 공적 신용보증을 대폭적으로 늘려 중소기업의 연쇄부도를 막은 것이다. 장기불황기의 일본에 대해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완만하지만 착실한 개혁을 추진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혁신 과정에서 미국식 경영 관리 시스템이 여러 분야에서 도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 국가나 기업의 혁신이 정착되려면 외부의 시스템을 통째로 도입하는 식으로는 잘 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기존의 제도와 새로운 시스템이 서로 융합하는 조정기간을 신중히 거치면서 느리지만 보다 착실한 혁신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본을 잊지 않는 착실한 혁신의 성과가 일본기업 일본경제를 부활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