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사절단 미국 파견 ]


국교정상화를 통해 한일문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경제인협회는 한미
민간협력체제 마련에 나선다.

한.미협력간담회가 7월1일 반도호텔에서 열렸다.

미국측 참석자인 AID극동국장, USOM 처장들은 경제사절단이 미국에 가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사회는 9월 17일 경제사절단 파견을 정식 결의했다.

필자는 사절단 파견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대외원조을 민간 협력방식으로 바꾸는 미국 정책에 대응하고 "수출제일주의"
의 성패도 미국시장 개척여부에 좌우될 것이다.

또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도 한국의 정치.경제의 안정성, 신뢰성을
알려야 한다.

이사회에서 필자는 특히 대외경협체제 구축에 있어서 "전략개념"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약소국으로 수모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 즉 "전략적 사고"가 절실하다
는 것을 유럽 작은 나라들의 예를 들어 상세히 설명했다.

한민족은 유사이래 중국만을 통해서 대외접촉을 해 온 만큼 "전략개념"이
발달할 기회가 극히 적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사절단원은 산업 무역 금융 분야등으로 균형있게
짜여진다.

문제는 누구를 단장으로 뽑느냐였다.

두 사람이 부상했다.

천우사 전택보 사장, 한미무역 이원순 사장이다.

대미 수출이나 경제관계를 보면 전택보 사장을 생각할 수 있으나, 전사장은
5.16직후 "반혁명 음모사건"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극구
사양했다.

이원순 사장에책무가 돌아갔다.

이원순 사장은 당시 이미 76세였으나, 1백4세에 돌아가신 분으로 그때는
심신이 50대에 못지 않았다.

1890년생으로 보성전문학교(현 연세대)에 수학했다.

14년 25세에 상해를 거쳐 밀항하다시피 미국 하와이로 탈출했다.

출국전 미국에서 취직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이상재 선생이 운영하는
YMCA에서 영문타자자격증을 1호로 땄다.

하와이에 와보니 그 정도의 타자실력으로 취직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탕수수 밭에서 하루 14시간씩 막노동하며 3백달러를 모아 행사을 하기
위한 중고자동차를 구입했다.

한의사, 약제상을 하신 조부가 아명 창식을 원순으로 "거짓없이 순박하게
살라"는 바람으로 지어주셨다.

("세기를 넘어서"이원순 자전 p.54) 이원순 사장은 조부 바람대로 사신
분이다.

그렇게 성실하다 보니 돈도 많이 모았고 상해 임시정부 재정위원이 되어
평생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60년대 누구나 넉넉하지 못한 시절에 월말 경제인협회 회비 납부 기일이
되면 회사어음에 액수를 적어 매달 꼬박꼬박 손수 가져오시는 분이었다.

회비를 손수 기일 내에 가져오는 회원은 이사장밖에 보지 못했다.

농담도 잘하고 80년초 필자가 전경련을 떠났을 때 가끔 만나면 이런 농을
했다.

"미스터 FKI, 왜 도망쳤어..." 필자에게 Mr. FKI라는 별칭을 만들어줬다.

또 이런 얘기도 자주 들려줬다.

1886년 청일 전쟁으로 청국이 패할 때까지 을지로 종로 일대의 상권은 중국
인의 손에 있었다.

이때 중국인들의 행패는 말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한인들을 아무 이유 없이 두드려 패기 일쑤였다.

당시 대인이라면 중국인을 말한다.

지금도 이원순 사장이 "왜 이 이야기를 본인이게 되풀이 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도 커지면 약자에게 힘을 과시할 충동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인간이나 국가간 관계를 지켜보곤 했다.

경제사절단 미국파견 일정을 잡기 위해서는 한.미 정부 기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직 상대방 연락처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대사관 영사관 미국무성 원조처 상무성 심지어 이들의 지방사무소까지
동원된다.

<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