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돌싱女 재혼 도와줘"…인사평가 낙제 '천재 공무원' 굴욕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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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월 2일까지
단원풍속도첩 '노상과안' 일부.
“과부 중매나 서고, 사냥이나 하러 다니고…. 이런 자를 그냥 둘 수 없으니 잡아들여야 합니다.”



1795년 조선시대, 충청 지방에서 보고서 한 장이 올라왔습니다. 한 마을의 원님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원님은 의금부(지금의 검찰)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범죄자가 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원님, 우리가 모두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단원 김홍도(1745~1806 이후). 조선 역사상 첫손에 꼽히는 천재 화가였지요.

뛰어난 그림 재주로 임금님의 눈에 들어 벼슬까지 한 김홍도. 하지만 양반 출신이 아닌 그를 곱게 보지 않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림 같은 하찮은 재주로 운 좋게 출세했구먼.” 그러던 차에 ‘먼지 털기’식 감사에 걸렸고, 인사평가 낙제점을 받아 이런 봉변을 당한 겁니다.



흔히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진 김홍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지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단원 김홍도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2일에는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박물관에서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유 관장의 강의 내용과 관점을 뼈대로 삼아, 지금부터 단원의 삶과 그림 세계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 김홍도

김홍도 하면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모든 종류의 그림을 빼어나게 잘 그린 천재"라는 게 유 관장의 설명입니다. 임금인 정조도 직접 이렇게 적은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김홍도는 그림을 잘 그리기로 이름난 지 오래다. 30년 전 내 초상을 그린 뒤로,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김홍도가 맡아 주관하게 했다.” 궁중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고, 임금까지 그렸던 화가. 당대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런 화가는 그 전에 없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김홍도는 1745년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인은 대를 이어 통역관이나 의사, 화가 같은 기술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일고여덟 살 무렵부터 김홍도는 표암 강세황(1713~1791)에게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강세황은 예조판서까지 지낸 문인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하나. 마침 이 무렵 강세황이 안산에 살고 있었기에, 김홍도도 안산 출신일 것이라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표암 강세황의 '자화상'(1782).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강세황이 일흔 살에 직접 그린 자신의 모습이다. 옥색 평상복 차림에 관료들이 쓰는 '오사모'를 쓴 모습이 눈에 띈다. 이를 통해 강세황은 자연을 벗 삼아 자유롭게 살고 싶은 선비의 이상과 나랏일을 맡은 관리로서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심리를 표현했다. 보물로 지정된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심사정·최북·김홍도 등이 그린 '균와아집도'(1763) 확대. 당대 이름난 화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아회를 함께 그린 합작으로, 김홍도가 인물을 맡았다. 스무 살도 되기 전 대가들 틈에서 보여준 솜씨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아쉽게도 김홍도 자신(왼쪽 아래 붉은 동그라미) 부분이 상해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개인소장
나이는 어려도 재주는 일찌감치 드러났습니다. 스무 살도 되기 전, 김홍도는 심사정과 최북, 강세황 같은 당대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 끼었습니다. 이 합작품에서 김홍도는 인물을 맡아 단정하면서도 정확한 붓끝으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유 관장은 "왼쪽 아래 김홍도의 얼굴 부분이 훼손된 게 아쉬울 따름"이라고 말했습니다.

김홍도의 호 '단원(檀園)'은 자신이 좋아했던 명나라 화가 이유방의 호 '단원'에서 따온 것입니다. 호를 지은 그는 스승 강세황에게 글 한 편을 청했습니다. '단원'의 '원(園)'은 정원, 즉 번듯한 집을 뜻하니 자기 집에 걸어둘 글을 부탁한 셈입니다. 그런데 강세황이 막상 붓을 들고 보니, 김홍도는 글을 걸어둘 집이 없는 무주택자였습니다. 그래서 강세황은 집에 거는 현판(懸板) 대신 김홍도의 짧은 일생을 적은 글을 써서 건넸습니다. 이것이 바로 '단원기'입니다.



유 관장은 "강세황이 '단원' 두 글자만 써줬다면 그저 서예 작품 하나로 끝났겠지만, 김홍도가 무주택자였던 덕분에 그의 생애를 적은 글이 남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단원기는 오늘날 김홍도의 일생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꼽힙니다. 이 글에서 강세황은 제자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못 하는 것이 없는 신필이며,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솜씨는 없었다. 인물과 산수는 물론 신선과 부처, 꽃과 새, 벌레와 물고기까지 무엇하나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신필(神筆)이란 신의 경지에 이른 붓이라는 뜻입니다.



김홍도는 스무 살 무렵 도화서에 들어갔습니다. 도화서는 나라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던 관청입니다. 임금의 초상, 궁중 행사의 기록, 궁궐을 꾸미는 그림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죠. 이곳에 소속돼 그림을 그리는 직업 화가를 화원(畵員)이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화원이 된 김홍도의 붓은 마음껏 춤추며 조선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을 그리다

기록에 따르면 김홍도는 풍채 좋은 미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맑고 훤칠하게 키가 커 속세 사람 같지 않고 신선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신선을 잘 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나와 있는 '피리 부는 어린 신선'을 보면,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어린 신선이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등에는 붉은 호리병을 메고 있고, 방금 깊은 산에서 내려왔는지 바구니에는 불로초와 솔잎이 가득합니다.

김홍도 '선동취적도(피리 부는 어린 신선)'(18세기). 피리를 부는 어린 신선을 그린 인물화다. 붉은 호리병을 메고 불로초가 담긴 바구니를 든 모습이 친근하다. /국립중앙박물관


'황묘농접도'(1790년대). 노란 고양이가 고개를 돌려 나비를 바라보는 그림이다. 고양이(猫)와 나비(蝶)는 발음이 각각 일흔·여든 살 노인을 뜻하는 글자와 비슷해, 둘을 함께 그려 "오래오래 장수하시라"는 축원을 담았다. 곁의 패랭이꽃과 바위는 젊음과 장수를 뜻한다. /간송미술관
미인도를 그리면 미인이, 화조도를 그리면 꽃과 새가 단원의 붓끝에서 살아났습니다. 나비를 그리면 나비가 날았습니다. 그가 부채에 그린 나비옆에 스승 강세황은 한마디 적었습니다. "나비의 가루가 손에 묻을 것 같다."



중국 옛 문인들이 정원에 모여 노는 장면을 그린 '서원아집도'에서도 그의 실력을 볼 수 있습니다. 김홍도는 이 모임을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각도로 그렸습니다. 보통 이렇게 그리면 사람 몸의 위아래 비례가 틀어지기가 쉽습니다. 유 관장은 "솜씨가 모자란 화가가 이런 각도를 그리면 인물들이 픽픽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데, 김홍도가 그린 사람들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작품은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서원아집도'(1778) 확대. 중국 송나라 문인들의 모임을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본 까다로운 구도로 그렸다. 그런데도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다. 병풍에 그린 이 작품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은 김홍도가 길에서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산수화나 양반의 초상화는 그려도 길거리의 일반인 그림을 그리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김홍도는 그 평범한 얼굴들을 품위 있게,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그렸습니다. 그 대표작이 '단원풍속도첩'입니다. 보물로 지정된 이 화첩을 한 장씩 넘기면 200여 년 전 조선 사람들의 하루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씨름'(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먼저 '씨름'입니다. 두 사내가 서로를 넘기려고 온 힘을 쥐어짭니다. 둥글게 둘러앉은 구경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면서 화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돕니다. 그런데 김홍도는 한쪽 구석에 등을 돌리고 엿을 파는 아이를 넣었습니다. 모두가 한 곳을 보는데 혼자 딴 데를 보는 이 아이 하나가 긴장을 풀어 주며 웃음을 줍니다.

'서당'(18세기)./국립중앙박물관
'서당'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봤을 그림입니다. 한 아이가 훈장에게 회초리를 맞았는지 바짓단을 추스르며 훌쩍입니다. 그 아이를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는 훈장의 표정도, 상황을 구경하는 친구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익살스럽지요. 김홍도는 이 장면을 옆에서 비스듬히 바라본 시점으로 그렸습니다. 덕분에 인물들의 표정이 모두 보이면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우는 아이에게 집중됩니다.

'기와 이기'(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일하는 사람들도 그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이 그림 '기와 이기'는 건설 현장을 중계하는 것 같습니다. 아래에서 던진 기와를 위에 있는 일꾼이 받아 들고, 흙 반죽 덩어리는 줄에 매달아 끌어 올립니다. 한쪽에서는 목수가 줄을 늘어뜨려 기둥이 똑바로 섰는지 한쪽 눈을 감고 살핍니다.

'행상'(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한편 '행상'은 조금 짠한 그림입니다. 남편은 낡은 벙거지를 쓰고 지게에 나무통을 졌고, 아내는 머리에 광주리를 인 채 등에 아이를 업었습니다. 먼 길을 걸으려고 바지를 동여맨 옷차림에서 고단함이 묻어납니다. 새벽부터 짐을 이고 지고 장터로 나서는 이 부부의 모습은 오늘날 새벽에 물건을 떼러 나가는 자영업자의 뒷모습처럼 보입니다.



김홍도의 화첩은 조선 사람들의 일과 놀이를 빠짐없이 담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 작품 '담배 썰기'의 왼쪽 아래에는 전기수(傳奇叟), 즉 소설책을 소리 내 읽어주는 낭독자가 있습니다. 당시 번화가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적벽대전이나 춘향전을 실감 나게 들려주는 이야기꾼이 있었습니다. 일꾼들이 지금으로 치면 돈을 주고 일종의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틀어 놓은 것이지요. 카메라도 없던 조선시대, 일반 백성의 일상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백성의 삶을 실감 나게 그린 김홍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하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겁니다.

'담배썰기'(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김홍도의 풍속화는 임금의 마음에도 쏙 들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정조는 화원들에게 한 달에 한 번 그림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한번은 이런 문제를 낸 적이 있거든요.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려라." 궁궐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던 정조에게 백성들의 삶을 담은 이런 그림은 재미있으면서도 민생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훌륭한 자료였을 겁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다

정조는 김홍도에게 어진, 즉 자기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화원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이었습니다. 김홍도는 평생 세 차례나 임금의 앞에서 어진을 그렸습니다. 다만 그가 맡은 부분은 늘 얼굴이 아니라 몸이었습니다. 옷 주름이 접히고 흐르는 모양, 옷감의 도톰한 질감을 실물처럼 살려내는 김홍도의 솜씨가 누구보다 빼어났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그린 어진은 사라졌지만, 그가 몸 부분을 맡은 ‘서직수 초상화’의 풍성한 도포에서 옷 그리는 솜씨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명기·김홍도 '서직수 초상'(1796). 얼굴은 이명기가, 몸은 김홍도가 그린 양반 서직수의 초상화다. 풍성한 흰 도포의 주름과 질감에서 옷을 실물처럼 그려낸 김홍도의 솜씨를 볼 수 있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조의 사랑은 벼슬로 돌아왔습니다. 어진을 그린 공을 비롯해 여러 공로가 쌓이면서, 김홍도는 40세에 안동의 역참을 관리하는 '안기찰방'으로 임명됐습니다. 역참은 나랏일로 오가는 관리들이 말을 갈아타고 묵어가던 곳입니다. 한 지역의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는 자리였지요.



이 무렵 정조는 김홍도에게 특별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금강산을 그려오거라." 정조는 임금이라 마음대로 도성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멀리 나가봐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 화성 정도였고, 살아서 금강산을 두 눈으로 볼 가능성은 없었죠. 그런데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금강산 구경은 죽기 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평생소원, 요즘 말로 '버킷리스트' 1순위였습니다. 정조 역시 금강산의 풍경을 두 눈으로 담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조는 가장 아끼는 화가에게 자기 대신 금강산에 가서 풍경을 담아오라고 한 겁니다.

'총석정'(1788).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관동을 답사하며 그린 '해동명산도첩'의 밑그림이다. 바다에서 솟은 육각 돌기둥의 결과 기세를 빽빽한 수직선으로 표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는 금강산과 강원도의 명승을 누비며 밑그림을 그려 왔습니다. 이 그림은 총석정을 그린 것입니다. 바다에서 솟은 육각 돌기둥의 결과 기세가 빽빽한 수직선으로 살아 있습니다. 임금에게 바칠 그림이라 한 획 한 획 공들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김홍도는 48세에 마침내 충청도 연풍의 현감이 됐습니다. 중인 출신이 오를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가뭄이 들자 가난한 사람들을 힘껏 도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화가였지 행정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숙한 구석은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시대에 잡스러운 재주라고 여겼던 그림으로 벼슬에 오른 그를 고깝게 본 시선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연풍 현감 김홍도는 감사에 걸렸습니다. 감사관은 보고서에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냥이나 다니고, 동네 과부가 외롭다며 중매를 섰다. 잡아들여야 한다"고 썼습니다. 결국 김홍도는 중죄인을 다루는 의금부로 끌려갈 처지가 됐습니다. 현감 재직 3년 차, 김홍도의 나이 51세였습니다.



이때 그를 구한 사람도 정조였습니다. 정조는 그가 의금부로 끌려가기 전에 그를 먼저 파직시켰습니다. 먼저 잘라버리면 더는 죄를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끼는 화가가 죄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잊혀가는 화가

파직된 뒤에도 정조는 계속 김홍도에게 그림을 맡겼습니다. 하지만 1800년 김홍도의 나이 56세에 정조가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큰 손님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사라지면서, 김홍도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중인이라 물려받은 땅이 없었습니다. 모아둔 재산도 없었던 그는 나이가 들수록 살림이 기울었습니다. 천재 예술가들이 때로 그렇듯, 헤픈 씀씀이도 어려움에 한몫했습니다. 조희룡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가난에 고생하던 김홍도에게 어느 날 그림값으로 3000전이 들어왔습니다. 마침 한 사람이 매화나무를 팔러 왔는데,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는 2000전을 떼어 그 매화를 샀습니다. 그리고 800전으로 술을 사 벗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는 자리를 열었다고 합니다. 쌀값으로 남은 건 200전뿐이었습니다.

'총석정'(1795). 김홍도가 51세 되던 해에 그린 을묘년화첩의 한 그림이다. /개인소장
재미있는 건 벼슬에서 내려온 김홍도의 그림이 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임금에게 바치던 그림은 한 획 한 획 빈틈없이 꼼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김홍도는 무엇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부유한 수집가에게 그려준 총석정 그림을 보면, 이전에 정조에게 바치기 위해 그린 그림과 달리 자유분방한 매력이 화폭에 넘쳐납니다. 안개 속 총석정의 모습은 먹의 농담으로 슬쩍 풀어놓듯 그렸고, 파도에 놀라 날아오르는 새 두 마리가 화면에 시원한 기운을 더합니다.

노매도老梅圖(1804). 김홍도가 예순 살 되던 해 겨울에 그린 작품으로, 그의 예술 세계가 무르익은 노년기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개인소장
환갑을 맞은 1804년 겨울, 그는 늙은 매화 한 그루를 그렸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딘 등걸에서 새순이 돋아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입니다. 거침없는 붓질로 등걸의 형태를 잡고, 짙은 먹이 번지는 효과로 비바람을 견딘 나무의 질감을 살렸습니다. 무심한 듯 툭툭 찍은 꽃망울과 군데군데 더한 노란빛이 보는 사람에게 은은한 매화 향을 느끼게 합니다. 이 그림에 그는 도장 하나를 찍었습니다. '권농지가(勸農之暇)'. 시골에서 농사일을 돌보는 틈틈이 그렸다는 뜻입니다.

기로세련계도(1804년경) 확대. 1804년 9월 송악산 기슭 고려 궁궐터인 만월대(滿月臺)에서 개성의 노인들이 모임을 가졌다. 화면 가운데 펼쳐진 그늘막을 중심으로 위는 송악산의 빼어난 산수를, 아래는 잔치 장면을 그렸다.


기로세련계도(1804년경) 확대. 가운데의 거지를 비롯해 구경꾼들이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김홍도 특유의 유머 감각도 드러난다.
같은 해, 그는 개성 만월대에서 열린 노인들의 큰 잔치도 그렸습니다. 잔칫상을 받은 노인만 예순네 명. 시중들고 구경하는 사람까지 더하면 삼백 명이 넘는 인파가 한 화면에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위로는 송악산의 빼어난 산수가 솟고, 아래로는 흥겨운 잔치가 펼쳐집니다. 산수화와 풍속화, 기록화가 한 폭에 어우러진 만년의 걸작입니다.



이런 그의 그림 세계를 한자리에 놓고 보면 단원이 왜 조선 최고의 화가로 불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궁중의 행사를 기록할 때 그는 꼼꼼하면서도 생생하게 현장의 모습을 담아냈습니다. 서민의 삶을 그릴 때는 그 삶 한복판에 들어가 진짜배기 현실을 그려냈지요. 산수를 그릴 때는 누구나 지나칠 법한 평범한 풍경에서 서정적인 조선의 정취를 길어 올렸습니다. 유 관장은 "김홍도는 눈앞의 대상을 가슴으로 느끼고 알아보는 능력이 남달랐고, 화가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한 번 더 끌어올렸다"며 "이런 화가는 정말로 고금에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쓸쓸한 최후

하지만 그의 삶은 저물고 있었습니다. 말년에 그가 쓴 편지 몇 통이 남아 있습니다. 한 친구에게는 "가을부터 여러 번 위독해서 죽을 뻔했다"고 적었습니다. 멀리 공부하러 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썼죠. "선생님께 드릴 수업료를 보낼 수가 없어 안쓰럽다.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천재 화가였지만 그는 아들의 학비조차 부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추성부도'(1805).
마지막으로 그는 한 폭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라면 누구나 외우고 다니던,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가 쓴 '추성부'를 그림으로 옮긴 추성부도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느 가을밤, 글을 읽던 이가 스산한 소리에 놀라 동자를 내보냈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였다. 그는 이 소리가 만물을 시들게 하는 '가을의 소리'임을 깨달았다. 풀과 나무가 때가 되면 잎을 떨구듯,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어찌 가을 소리를 원망하겠는가." 노년의 붓질과 쓸쓸한 내용이 김홍도의 끝을 미리 알리는 듯한 작품입니다.

추성부도 확대.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언제 죽었는지 기록도 남지 않아 1806년 62세 이후 어느 즈음 눈을 감았으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릅니다. 임금의 얼굴부터 길거리 거지까지 세상 모든 사람을 그렸던 김홍도. 정작 그 자신은, 그가 화폭에 담았던 이름 없는 백성들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작품은 남아 있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에 나온 그의 그림 속에서 200여 년 전 조선 사람들은 여전히 씨름을 하고, 회초리에 울고, 짐을 지고 장터로 향합니다. 다만 이 그림들은 지금이 아니면 한동안 다시 보기 어렵습니다. 오래된 그림들은 빛에 약해서, 한 번 전시한 뒤에는 한참을 수장고에서 쉬어야 하거든요. 이번 전시는 8월 2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기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자료와 유홍준 관장의 6월 2일 강연 등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지금 해외에 계시거나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분들도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 관장은 "2028년 호암미술관에서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의 도움을 받은 그의 대규모 전시가 열릴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또다시 기사로 전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미술 소식과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출간된 4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 표지작(피카소의 책 읽는 소녀)을 비롯해 시리즈에서 다룬 여러 거장들의 명작들을 실제로 볼 기회입니다. 한국경제신문사 인스타그램(@hankyung_bp)과 기자 인스타그램(@syoung_art)에서 관련 이벤트가 진행 중이니 놓치지 마세요.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