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급속한 산업화로 대형 사고가 잇따르면서 과실책임의 한계가 드러났다. 기계 결함, 화학물질 폭발 같은 사고는 단순히 개인 과실로 발생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과실 입증이 어려워 법적 책임을 묻기 힘든 사례도 많았다. 위험한 일을 하는 경우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사업주나 공장이 일정 부분 사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무과실책임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 원칙은 제조물 책임, 산업재해, 환경법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어제 보이스피싱 피해에 금융회사의 무과실책임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 8월 발표된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에 포함된 내용으로, 금융사가 일정 한도 내에서 피해액을 보상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은 무과실책임을 지는 산업재해 등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보이스피싱은 사기 범죄이기 때문에 금융사만의 예방 노력으로는 막기 힘든 측면이 있다. 금융사 시스템이나 관리상 부주의를 문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전 세계에서 보이스피싱에 금융사의 무과실책임을 묻는 나라는 영국과 싱가포르 정도인데, 이들 나라도 고객의 합리적 주의 의무가 충족될 경우에만 환급해주고 있다. 만약 금융사가 무조건적 보상을 한다면 환급금을 노린 공모 범죄가 늘어나고, 금융사의 비용 부담이 고객에게 전가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올 들어 11월까지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총 1조1330억원으로, 지난해 대비 56% 급증해 대책이 시급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무과실책임을 금융사에 무리하게 적용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금융사들은 이미 법적 대응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근절은 정부의 기본 책무다. 금융사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다면 ‘책임 떠넘기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욱진 논설위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