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의 '카르멘', 부산은 15분의 환호로 화답했다

콘서트오페라 '카르멘'

19·20일 부산콘서트홀서
정명훈 지휘로 아시안필 호연
노래와 연기로 생생한 연출

테너 이용훈의 돈 호세
당당한 군인에서 파멸로 전환

소프라노 미셸 로지에
차분하고 단단한 카르멘
지난 19~20일 부산콘서트홀에서 정명훈의 지휘로 열린 콘서트 오페라 ‘카르멘’에서 메르체데스 역 김가영(왼쪽 사진 왼쪽부터), 카르멘 역 미셸 로지에, 프리스키타 역 이혜지가 열연하고 있다. 클래식부산 제공
‘직업 군인 출신인 한 남성이 헤어진 전 동거녀를 흉기로 살해한 뒤 경찰에 자수했다. 피해자로부터 새로운 연인과의 만남을 시작하겠다며 결별을 통보받은 그는 집요한 스토킹 끝에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 뉴스에서나 접했을 법한 이 비극적 이야기는 조르주 비제(1838~1875)의 오페라 ‘카르멘’의 결말을 요약한 것이다. 집시, 군인, 밀수꾼, 투우사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초연 당시 큰 충격을 안겼다. 신화 속 인물이나 역사적 영웅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다. 150년이 지난 지금, 이 작품은 전 세계 오페라하우스에서 가장 많이 상연하는 프랑스 오페라가 됐다.

부산 콘서트홀 무대에 콘서트 버전(콘체르탄테) 오페라 카르멘이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국내 오페라 팬의 시선은 자연스레 테너 이용훈에게 쏠렸다. 세계 최정상 오페라극장에서 가장 신뢰받는 돈 호세 역의 대표 주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2027년 오페라하우스 개관을 앞두고 “부산에 오페라의 DNA를 심겠다”고 공언한 정명훈 감독이 지휘봉을 든다는 점에서 이 공연이 단순한 콘서트 오페라 이상의 사건이 될 것임을 예상하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지난 19일과 20일 부산 콘서트홀 무대에 오른 콘서트오페라 카르멘은 한국 오페라 역사상 원작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공연으로 기록될 만한 무대였다. 인물의 설정과 가창에서 기존 국내 프로덕션과 뚜렷하게 차별화된 완성도를 보여줬다.

카르멘은 억척스럽고 과장된 팜파탈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었다. 몰도바 출신 메조소프라노 미셸 로지에의 카르멘은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인물로 그려졌고, 그 자유는 공격적이기보다는 차분하고 단단한 태도로 표현됐다. 특히 ‘하바네라(Habanera)’의 마지막 고음에서 소리를 세게 밀어붙이지 않고 섬세하게 처리한 것이 신선한 인상을 남겼다. 4막에서 붉은 의상을 벗은 뒤 죽음을 암시하는 검은 의상을 입고 차분한 말소리로 노래하던 그의 연기는 주인공의 비극적 운명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돈 호세 역을 맡은 이용훈이 카르멘과 비극적 장면을 연출하는 모습. 클래식부산 제공
이용훈의 돈 호세 역시 비극적 집착에 사로잡힌 남성으로만 소비되지 않았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단정함과 균형 잡힌 신체를 지닌 인물로 등장해 왜 카르멘이 그에게 끌렸는지를 외형적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히 설득시켰다. 그의 가창은 2018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카르멘에 출연했을 당시 해외 오페라 전문 매체들이 남긴 평가를 이번 무대에서도 그대로 입증했다. 오페라와이어는 당시 리뷰에서 “돈 호세 역의 한국 테너 이용훈은 때로는 바리톤에 가까운 음색으로, 때로는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테너의 면모를 드러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했다”고 평했다. 카르멘을 자극하는 남성적 매력의 투우사 에스카미요 역을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날렵한 체구로 변신한 바리톤 김기훈과, 미카엘라 역의 소프라노 카라 손(손현경) 역시 무대의 균형을 잘 잡았다. 조연들도 빛났다. 카르멘의 친구 프리스키타 역의 소프라노 이혜지와 메르체데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가영은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집시 카르멘에게 왜 수많은 남자가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정명훈의 지휘 아래 음악을 책임진 아시안필하모닉(APO)과 합창단은 이번 공연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중 장면이 잦은 이 작품에서 합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극의 긴장과 리듬을 주도하는 핵심 요소다. 이번 무대의 합창은 음정과 리듬의 정확성은 물론 장면마다 요구되는 성격 변화를 또렷하게 구현하며 서사의 흐름을 탄탄하게 지탱했다. 콘서트 버전이라는 형식적 제약 속에서도 무대에 충분한 극적 밀도를 부여했다.

APO는 도쿄필하모닉 악장 가오루 곤도가 객원 악장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중국·일본의 젊은 연주자들이 모여 힘찬 연주를 들려줬다. 한국 연주자 가운데 첼로 파트 수석으로 참여한 문태국의 안정감 있는 리드와, 3막 간주곡에서 플루트 수석 박지은의 섬세한 솔로가 탁월했다. 청중은 15분간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무대에 화답했다.

성공적인 무대였던 만큼 한 가지 과제도 남겼다. 부산오페라하우스가 개관하면 오페라를 지속적으로 책임질 상주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공연계 한 관계자는 “뛰어난 기량을 지닌 APO지만 각자 본업을 지닌 단원들이 모인 오케스트라가 상주단체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혹은 부산시향이 그 역할을 할지를 두고 개관 이전부터 검토와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