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과 중국 리커창 총리,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해 12월 24일 중국 쓰촨성 청두 두보초당에서 한중일 협력 20주년 기념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왼쪽부터)과 중국 리커창 총리,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해 12월 24일 중국 쓰촨성 청두 두보초당에서 한중일 협력 20주년 기념 제막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과 일본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 세계적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이제는 상호 협력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이 양국에서 쏟아지고 있다. 하루 200명 안팎의 신규 확진자가 발생하며 코로나19 확산세가 꺾이지 않는 일본의 상황이 우선 다급해서다. 한국의 진단키트 지원 얘기가 나오는데, 아베 정부는 왜 소극적이냐는 비판이 일본내에서 나올 정도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선 수출 절벽에 유동성 위기로 기업의 어려움이 크다. 한·일 통화스와프 재개로 외환보유의 이중, 삼중 안전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비등하는 가운데 기존 글로벌 공급망을 대체하는 새로운 생산시스템을 고민해야 하는 과제도 양국 기업에 모두 던져졌다. 여기에 김정은 신변이상설로 인한 한반도 정세 불안이 가속되고 중국의 정치군사적 입김은 한반도에서 더욱 커질 수밖에 없어 한·미는 물론 한·일간 안보협력의 필요성도 점증하고 있다. 얼어붙은 한·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은 차고도 넘친다.

◆'韓 코로나 지원' 받자는 일본내 목소리

일본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국제 공조가 가장 큰 과제다. 일본의 코로나19 확진자는 지난 27일 172명 추가돼 크루즈선 탑승자를 포함해 총 1만4153명으로 늘어났다. 하루 전인 26일에는 신규 확진자가 210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이 한달 전 느꼈던 사회 전체의 극도의 불안이 일본 열도를 뒤덮고 있다. 이때문에 한국의 감염확산 방지 경험을 '전수'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대표적으로 일본 아사히신문은 지난 25일 특파원 리포트를 통해 세계 표준으로 인정받는 한국식 코로나19 검사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반향을 일으켰다. 실제로 한국의 코로나19 검사 건은 총 95만건으로 일본의 5배 수준이다. 체면 차릴 때가 아니라, 확산 방지 노하우를 소중하게 공유해야 한다는 자성이다.

일본 언론들은 지난 15일 한국의 총선이 치러진 직후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앞다퉈 촉구하기도 했다. 아사히신문과 일본경제신문, 도쿄신문 등은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총선 이후 안정적 국정 운영이 가능하게 됐다고 전하며, 지금이 양국 관계 개선의 호기라는 논평을 쏟아냈다. 아사히신문의 지한파 언론인 하코다 데쓰야 논설위원은 자신의 이름을 단 사설에서 "바이러스에 국경은 없다. 역사 및 영토 문제는 더더욱 있을 리 없다"는 고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40년 이상 지속된 경제적 공생관계

냉랭한 한·일 관계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계기는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일본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었다. 작년 중반 일본이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을 규제하고 화이트 리스트(수출 간소화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식으로 대응에 나서며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이후 한국도 일본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고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갈등, 단기체류 사증(비자) 면제 중단 조치 등으로 서로 치고 받기를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내 정서는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관련 국산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렀다. 과도하게 의존도 높은 품목은 또다른 부품조달 경로를 확보하고 재고 전략을 다시 짜는 등 공급망 변화를 꾀하며 리스크를 줄이는 게 맞다. 이러다 보면 한국내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간 분업이 활성화, 고도화될 수 있고 연구, 기획, 디자인, 마케팅, 법무 등 제조와 관련된 서비스산업의 수요기반도 확충하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모든 소재산업을 국산화, 자급화하는 것은 어려울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에 따르면 과거 한국의 수출은 시장 규모는 크지만 기술 난이도가 높지 않은 범용 제품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일본은 시장 크기는 작아도 오랜 기술 축적으로 수많은 품목에서 높은 시장점유율을 유지했다. 양국의 산업은 이런 구조적 필요에 의해 '고부가가치 부품 공급-완제품 생산'이라는 공생관계를 40년 이상 맺어올 수 있었다.

한국이 첨단산업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단계로 발전한 것도 일본의 강력한 부품 업체들 없이는 힘들었다. 예를 들어, 일본 미쓰이금속은 회로 형성 재료인 스마트폰용 초박형 동박(銅箔) 시장을 90% 점유하고 있다. 스미토모중기계공업은 MRI용 냉동기 시장을 80% 점유하는 등 압도적 세계시장 점유율 가진 일본 제품이 많다. 한국 기업이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만들려면 일본 기업과 손잡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는 얘기다.

◆변화된 세계경제 속 새로운 협력 가능성

한국 기업은 일본에도 중요한 고객이며, 한국 시장은 일본 기업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과 한국인 관광객 급감으로 일본에선 맥주제조업체, 유니크로 등 의류업체, 관광산업이 발전한 지방 도시, 심지어 지방은행까지 타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작년 3분기 일본의 실질 성장률이 전분기 대비 0.2%(연율 기준)에 그친 것도 이런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결국 단절되고 무너진 공급망 복구를 위해서는 날선 감정 대립을 청산하고 양국 관계를 개선하려는 정부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양국의 역사 인식 차이와 우경화하는 일본, 느슨해지는 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한 일본의 경계 등으로 관계 개선에 어려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의식적으로 교류·협력에 나서고, 그런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최근 아프리카 등지에서 코로나19를 피해 자국으로 송환하는 항공편에 한국과 일본은 상대국 국민을 일부 동승시키며 좋은 모범을 만들기도 했다.

앞으로의 세계 경제는 지구촌 차원의 세계화가 아닌 지역 블록화로 나아갈 것이란 전망이 많다. 코로나19와 같은 리스크가 일상화할 수 있어 생산시스템을 유럽, 아시아, 남미 등지로 분산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지역단위의 경제협력, 블록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 있다. 결국 가장 먼저 손잡아야 하는 상대는 한국에게는 일본, 일본에게는 한국이 아닐까.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