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을 끊는 데 돈을 쓰고, 산을 달리면서 고생을 사고, 몸의 스탯(능력)을 올리는 데 지갑을 연다. 뿌리는 같다. 넘치는 연결과 경쟁 속에서 ‘확실하게 내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되찾으려는 욕망이다. 요즘 소비자는 광고 문구보다 피부 진단 결과를, 화면 속 이미지보다 직접 찾아간 공간을 믿는다. 생필품 구매 같은 간단한 결정은 인공지능(AI) 추천과 익숙한 멤버십에 맡겨 스스로를 돌볼 시간을 확보한다. 한국경제신문은 유통·소비재업계 데이터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2027년 10대 소비 키워드’를 30일 선정했다.
그래픽=김하경 기자
(1) 벙커 소비
24시간 연결 속에 희소해진 건 ‘끊김’이다. 그래서 소비자는 강제로 끊어주는 공간에 돈을 낸다. 대표적인 게 사우나다. 패션 플랫폼 29CM에서 1~9월 ‘목욕가방’ 검색량은 250% 늘었다. 지난 7월 네이버 ‘1인 사우나’ 검색자의 71%가 2030세대였다. 회당 8만~20만원대인 1인 세신숍도 서울 강남·마포·용산 등으로 퍼졌다. 숙박업계는 ‘빼기’를 간판으로 내걸었다. 강원 홍천의 웰니스 리조트 힐리언스선마을은 인터넷을 차단한 ‘의도된 불편’을 앞세운다. 체크인할 때 투숙객의 휴대폰을 금고에 맡기는 상품도 나왔다. 묵언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 있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도 늘었다. 상반기에만 18만 명이 산사를 찾았고 참가자 가운데 20~30대 비중이 42%였다.
(2) 노력 프리미엄
1㎞를 달리고, 무게판을 얹은 썰매를 밀고, 다시 1㎞를 달린 뒤 로잉머신으로 노를 젓는다. 달리기와 근력운동을 번갈아 하는 실내 피트니스 레이스 ‘하이록스’의 다음달 서울 대회 티켓은 오픈 1시간 만에 매진됐다. 가장 싼 참가비가 20만원이 넘는데도 수요가 몰려 주최 측은 대회 일정을 이틀에서 사흘로 늘렸다. AI가 글을 쓰고 앱이 장을 봐주는 시대일수록 ‘내가 해냈다’는 감각이 희소해졌다. 운동 기록과 손으로 완성한 물건은 물성이라는 감각과 성취감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준다. 직접 조립한 가구를 더 아끼는 ‘이케아 효과’처럼 스스로 완성한 결과물과 습득한 기술은 정체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증표가 됐다.
유통가는 이 ‘고생’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달 트레일러닝 대회 ‘서울 100K’와 연계한 아디다스 팝업을 열고 러닝 용품과 커스터마이징 프린팅 체험을 선보였다. 뉴발란스는 7000명이 달리는 서울 10㎞ 레이스를 열면서 참가권을 러닝화와 묶은 패키지를 더현대서울 등에서 선착순으로 팔았다.
(3) 프로토콜 커머스
퇴근길 지하철에서 피부과 전문의 유튜버의 ‘4주 모공 루틴’ 영상을 본 한 직장인이 설명란 링크를 누른다. 클렌저와 앰풀, 미용기기, 사용 순서가 적힌 카드가 한 상자에 담긴 세트 상품이 뜬다. 앰풀 한 병이 아니라 ‘언제, 무엇을, 어떤 순서로’를 파는 것이다. 정보가 넘칠수록 하나하나 비교하고 판단하는 비용이 커진다. 끝없는 검색에 지친 소비자는 검증된 ‘프로토콜’을 통째로 사서 고민을 끝낸다.
전문가의 레시피가 곧 상품이 된다. 미국에선 사업가 브라이언 존슨이 자신의 노화 방지 루틴 일부를 ‘블루프린트 스택’으로 묶어 한 달 치를 343달러에 판매한다.
(4) 소식 경제
마운자로 등 GLP-1 비만치료제는 식욕 자체를 줄였다. 식품산업이 수십 년간 기대온 ‘더 많이, 더 싸게’의 공식이 ‘더 작게, 더 진하게’로 뒤집히고 있다. 덜 먹게 된 소비자는 한 입의 밀도를 따진다. 오픈서베이에 따르면 비만치료제 복용자는 단백질 섭취량을 직접 계산하고 기록할 만큼 꼼꼼했지만 필요량을 채우는 데는 부담을 느꼈다. 매일유업은 350mL 한 병에 단백질을 꽉 채운 ‘셀렉스 프로핏’ 신제품을 냈고, 남양유업은 ‘테이크핏 몬스터’의 단백질 함량을 43g에서 45g으로 올렸다.
해외에선 외식 체인이 비만치료제 복용자를 겨냥해 양을 줄인 고단백 메뉴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스무디킹은 GLP-1 전용 스무디 메뉴를 판매하고, 쉐이크쉑은 GLP-1 친화 메뉴를 포함한 ‘굿 핏 메뉴’를 내놨다.
(5) 스탯 쇼핑
게이머가 게임 캐릭터의 공격력과 체력 같은 ‘스탯’을 올리듯 소비자는 수면 시간과 식후 혈당, 골격근량을 관리하기 위한 상품을 고른다. ‘몸에 좋다’는 추상적인 설명 대신 써보고 얼마나 달라졌는지 측정된 점수가 구매 근거다. 웨어러블 기기와 연속혈당측정기(CGM) 등 측정 도구가 일상으로 들어온 게 결정적이다. 무엇을 먹었을 때 혈당 그래프가 치솟고 언제 완만해지는지 눈으로 확인하면서 당뇨 환자가 아닌 사람들도 혈당을 관리해야 할 ‘숫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상품도 스스로 스탯을 표기한다. 단백질 음료는 그램 수를, 재생 화장품은 PDRN 함량과 순도, 분자량을 앞세운다. 숫자가 크고 측정 가능할수록 잘 팔린다. 피부 상태도 점수로 잰다. 올리브영 매장의 피부 측정 서비스 ‘스킨스캔’은 누적 이용 100만 건을 넘겼다. 지난달엔 스마트폰 사진 한 장으로 모공 상태와 색소 침착, 주름 등을 항목별로 분석하는 모바일 진단을 내놨다.
(6) 더마 리테일
더마(피부과학+화장품) 뷰티가 각광을 받으면서 화장품이 제약회사의 기술을 끌어들이고 있다. 올리브영은 국내 제약사와 선보인 ‘어드밴스드 더마’ 전용 매대를 출시 약 4개월 만인 지난 8월 전국 650개 매장으로 늘렸다. 6월 이 상품군 매출은 4월보다 260% 증가했다. 피부과 시술이 대중화하면서 소비자의 성분 관련 지식이 높아졌다. 진열대를 채우는 것보다 ‘왜 내 피부에 맞는지’ 설명할 수 있는 상담과 분석 역량이 유통 채널의 경쟁력이 됐다.
약국에는 뷰티 매대가 들어서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옵티마웰니스뮤지엄(OWM)은 피부 분석 서비스와 화장품 성분 정보를 확인하는 키오스크, 약사 상담 서비스를 한 공간에 모았다. 화장품 매장 안으로 약국이 들어가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지난달 문을 연 ‘무신사 뷰티 홍대’는 지하 1층 전체를 ‘뷰티온누리약국’으로 구성했다. 약사 2명이 상주하고, 270여 개 브랜드 2000여 개 상품 가운데 90%를 뷰티 제품으로 채웠다.
(7) 성지 리테일
지난달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그룹 리센느의 팝업스토어는 사전예약을 받은 당일 신청이 마감됐다. 멤버들이 기획에 참여한 티셔츠와 키링 등을 선보인 행사였다. 팬에게 팝업스토어 방문은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관심을 현실의 일정으로 만드는 일이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일은 이미 e커머스로 넘어갔다. 오프라인 매장이 살아남으려면 ‘굳이 가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콘텐츠 세계에 직접 들어가 보는 경험은 화면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성지 순례’ 문화가 일반화하면서 유통업체의 집객 공식도 바뀌었다.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팝업 600여 건 가운데 40% 이상이 지식재산권(IP) 팝업이었다. 아예 상설 성지를 짓기도 한다. 아이파크몰의 팝업 전용 공간 ‘도파민 스테이션’은 문을 연 지 1년 만에 누적 방문객 1000만 명을 넘겼고, 1~7월 매출은 전년보다 38% 늘었다.
(8) 안목자본
안목을 갖춘 바이어와 에디터, 셰프와 장인의 이름을 건 큐레이션이 주목받고 있다. 경기 파주에 있는 사적인서점의 기본 책 처방 프로그램 가격은 7만원이다. 책처방사와 1 대 1로 대화한 뒤 두세 권을 추천받고, 그중 한 권을 골라 가져가는 구성이다. 책방에서 값을 매긴 것은 책과 함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적합한 문장을 찾아주는 과정이다.
AI는 평균적으로 괜찮은 것들을 내 취향에 맞게 내놓는다. 편리하지만 그 안에선 ‘내가 몰랐던 좋은 것’을 만나기 어렵다. 알고리즘이 내 과거를 비춰준다면, 안목 있는 사람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가리킨다. 전통주 구독 서비스 ‘술담화’는 매달 큐레이터가 시음해 후보를 고르고 양조장을 방문해 품질 등을 확인한다. 피크닉이나 집들이처럼 상황에 맞는 주제를 정해 술을 묶는다.
(9) 리텐션 소비
고물가 속에서 소비자는 새 브랜드를 탐색하는 수고보다 이미 낸 비용에서 ‘본전’을 뽑는 리텐션(재방문·재구매)을 택한다.
배달,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적립이 하나로 묶이며 멤버십은 브랜드가 아니라 생활 인프라가 됐다. 이미 만족한 곳에서 할인과 적립을 확보한다. 익숙함이 실질적인 혜택과 결합한 것이다. e커머스 이용자의 75.9%가 유료 멤버십에 가입했고, 절반 이상이 1년 넘게 유지했다. 멤버십에 가입한 뒤 해당 플랫폼을 쇼핑 1순위로 쓰는 비율은 쿠팡이 136%, 네이버가 99% 늘었다.
경쟁사끼리도 손을 잡는다. 네이버는 멤버십 회원에게 배민클럽 2개월 무료 이용권을 주고, 배민클럽은 유튜브 프리미엄과의 결합 상품을 선보였다. 티빙은 디즈니플러스와의 통합 요금제를 내놨고, KT는 티빙·웨이브·디즈니플러스를 묶어 따로 구독할 때보다 약 37% 싸게 판매한다.
(10) 미닛 경제
초경쟁 사회에서 가장 비싼 자원은 시간이다. 배달비는 시간을 아껴주는 값이다. 소비의 속도가 분(미닛) 단위로 바뀌고 있다. 주말마다 한꺼번에 채우는 장바구니를 넘어 오늘 빠진 것만 보충하는 주문이 늘고 있다. 1~2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미리 쟁여두는 생활은 필요할 때 즉시 해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물건을 쟁여둘 공간도, 대용량을 다 쓸 식구도 없다.
집 앞 편의점은 30분짜리 창고가 됐다. GS25의 퀵커머스 매출은 2024년 전년 대비 75.4%, 2025년 64.3% 늘었고 올해 1분기엔 79.5% 증가했다. CU 배달 매출은 1~4월 91.6% 뛰었다. 매장에서는 정확한 재고와 빠른 포장, 소비자가 예상할 수 있는 도착 시간이 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