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서울 공연 리뷰
클라라 주미 강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도 연주...묵직한 현악 음색 빛나
자유로우면서도 포인트 살리는 표현 두드러져
거장 예르비, 지휘 마치자 한국인 연주자에게 격려
발트 해의 대자연을 음악으로 품고 있는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가 한국에 왔다. 에스토니아가 자랑하는 지휘자이자 유럽에서 손꼽히는 거장인 파보 예르비가 지휘를 맡았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콩쿠르 우승자인 한국계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과 합을 맞췄다.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 공연. /사진출처. 빈체로/WON HEE LEE
올가을 클래식 음악계의 주요 행사로는 에스토니아 악단들의 내한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월 에스토니아 국립교향악단이 내한한 데 이어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EFO가 공연했다.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3국으로 불리는 북·동유럽 국가. 앨범 400여장을 발매한 세계적인 지휘자 네메 예르비가 이 국가 출신이다. 그의 아들인 파보 예르비도 지휘자로서 2011년 EFO를 창단했다. 오이스트라흐, 쇼스타코비치 등이 머물며 음악적 영감을 얻던 해안 도시인 패르누에서다.
바이올린으로 드러낸 애절함
파보 예르비와 함께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 EFO는 에스토니아의 현대 음악 작곡가인 에르키스벤 튀르의 ‘액션-패션-일루전’ 2·3악장을 연주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더블베이스 8대가 내는 두툼한 저음 울림은 북유럽의 장엄한 침엽수립을 떠올리게 할 만큼 묵직했다. 이 묵직한 현악 음색은 이날 공연에서 EFO가 여러 차례 드러난 특징이었다. 바이올린은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두께감이 있는 떨림을 연출하며 긴장감을 더했다.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 공연. /사진출처. 빈체로/WON HEE LEE
협연자로 무대에 오른 클라라 주미 강은 바닥에 닿는 빨간 드레스로 단번에 이목을 끌었다. 연주곡은 고전주의 형식과 낭만주의 표현이 잘 섞인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클라라 주미 강은 감정을 담담히 풀어내며 템포가 늘어지지 않도록 했다.
악단은 반응이 매번 기민하진 않았지만 지휘자 파보 예르비가 명확히 지시한 부분에선 디테일을 살렸다. 1·2악장 모두에서 악단보다 독주자의 음색이 살짝 더 뜨거운 경향이 도드라졌다. 두 연주 주체 사이의 음색 온도는 이질적이기보단 서로의 매력을 살리는 쪽에 가까웠다.
3악장 총주에선 악단 소리가 뭉치지 못하고 성기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여러 악기들이 내는 음색의 다채로움 만큼은 선명했다. 독주 바이올린은 보잉의 끝에 힘을 쏟길 반복하며 절제된 애절함을 드러냈다. 세부 악기들과 독주 악기 모두의 매력이 함께 살아나는 맛이 있었다. 클라라 주미 강은 바흐의 바이올린 파르티타 1·2번에 담긴 사라방드를 앙코르로 들려주며 회한의 정서를 살며시 띄웠다.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 공연. /사진출처. 빈체로/WON HEE LEE음악의 즐거움을 드러낸 EFO
공연 2부는 에스토니아와 바다를 마주하는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이었다. 1악장 시작부터 현악기의 소리가 두껍게 쌓이며 무대에 숲이 꽉 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숲속 사이로 호른 소리가 용감하게 뛰어올랐다가 사라지길 수차례, 지휘자는 음량을 바꾸는 과정에 곡선미를 가미해 듣는 맛을 살렸다. 조금씩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프레이즈(악구)를 이어가던 1악장 마지막은 음악으로 전하려는 서사가 분명했다.
2악장은 생동감이 넘쳤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용솟음치듯 생기를 불어넣고 흩어지는 과정은 귀가 즐거웠지만 호불호가 갈릴 만했다. 금관 울림은 안개보다는 시원한 봄비를 떠올리게 했다. 현악기가 피치카토(한 음을 떨듯 내는 연주법)로 숨을 죽이다가 금관이 웅장함을 쏟아낼 땐 자극적이기까지 했다. 1악장 주제를 되살린 3악장에선 관악기들이 낸 소리의 물길이 거대해졌다. 더블베이스가 활의 나무 부분을 활용하는 ‘콜 레뇨’ 연출에선 폭포수가 떨어지듯 박력이 있었다.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 공연. /사진출처. 빈체로/WON HEE LEE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단원 저마다의 즐거움이었다. 전반적인 소리가 매우 밀집된 건 아니었지만 개별 악기가 부각 되는 부분에선 연주자들이 열의를 숨기지 않았다. 저마다 개성 넘치는 소리를 뽐내다가도 중요한 순간엔 한데 수렴해 긴밀함을 잃지 않았다. 뷔페처럼 맛볼 수 있던 여러 소리의 질감들은 3악장 마지막 여섯 번의 화음으로 꽉 응축됐다. 이렇게 흩어지고 모이는 즐거움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자유분방한 면모를 관객에게 전하기에 충분했다.
한국인 연주자들...에스토니아와 한국을 이었다
피날레가 끝나고 환호가 쏟아지자 지휘자는 호응을 더 유도하는 듯한 손짓으로 관객과 소통했다. 그렇게 앙코르로 들려준 스웨덴 작곡가 알벤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위한 엘레지’는 관객에게 현악이 뭉쳐 내는 아름다운 울림을 전했다. 뒤이어 들려준 브람스 헝가리 무곡 1번은 합주의 짜임이 치밀하진 않았지만 별 상관이 없었다. 지휘자도, 연주자도, 관객도 음악을 즐기느라 행복한 기색이 뚜렷했으니 말이다.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EFO) 공연. /사진출처. 빈체로/WON HEE LEE
공연에선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은·윤보나·김원호 등 한국인 연주자들의 활약도 엿볼 수 있었다. 더블베이스 수석인 홍성혁도 이날 열정적인 보잉으로 더블베이스의 짙고 야성적인 저음을 관객들에게 각인시켰다. 교향곡 지휘를 마친 예르비가 홍성혁에게 다가와 격려 인사를 전하는 모습은 유럽 음악계 곳곳에서 감초가 된 한국인 음악가들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