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 등 팀코리아가 수주한 체코 두코바니 원전 지질조사 현장.  /사진=한국수력원자력
한국수력원자력 등 팀코리아가 수주한 체코 두코바니 원전 지질조사 현장. /사진=한국수력원자력
"벽산의 도움 없이는 일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사업을 위해서도 벽산이 필요합니다."

벽산엔지니어링이 체코 두코바니 대형 원전 건설 현장에서 지반조사 기술자문을 마무리해가던 지난 6월. 발주처인 체코전력공사(CEZ)의 엔지니어링 자회사 체즈EP 기술부 실무진은 자사 사업부에 이같이 보고했다.

영국 롤스로이스가 짓는 소형모듈원자로(SMR) 부지의 지반조사에도 벽산의 기술자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이끄는 ‘팀코리아’의 일원으로 두코바니 사업에 참여해 기술력을 입증한 끝에, 벽산이 처음으로 팀코리아의 도움 없이 독자 해외 사업을 따낸 순간이었다.

영국이 체코에 짓는 SMR에서 사업 따낸 벽산

19일 원전업계와 정부 등에 따르면 약 1년간의 체코 두코바니 지반조사 기술자문 사업을 마치고 지난 7월 귀국한 벽산 원전조사팀은 지난달 중순 다시 체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행선지는 두코바니에서 서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테멜린. 체코전력공사가 롤스로이스에 발주한 470MW급 SMR 부지의 지반 안전성을 조사하는 데 기술자문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벽산이 테멜린까지 진출하게 된 발판은 1년 전 정부와 팀코리아의 두코바니 수주전의 협상 비화에서 비롯됐다. 당시 최대 쟁점 중 하나는 체코 자국 기업의 참여 비율(현지화율)이었다. 현지 공급망 한계로 30%를 넘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체코 정부는 60%를 완강히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국 원전 지반조사 1세대'인 박인식 벽산엔지니어링 전문위원(전무급)이 이끄는 벽산팀이 체코 테멜린에서 영국 롤스로이스의 소형모듈원자로(SMR) 부지 지반조사를 자문하고 있다.  /사진=벽산
'한국 원전 지반조사 1세대'인 박인식 벽산엔지니어링 전문위원(전무급)이 이끄는 벽산팀이 체코 테멜린에서 영국 롤스로이스의 소형모듈원자로(SMR) 부지 지반조사를 자문하고 있다. /사진=벽산
체코전력공사가 한수원에 "인프라 건설 지반조사 경험이 풍부한 자회사 체즈EP에 지질조사 업무를 맡겨달라"고 요청한 것도 현지화율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체즈EP는 댐이나 도로 같은 일반 인프라 조사 경험만 있을 뿐, 규제가 엄격하고 고도의 정밀도가 요구되는 원전 기준에 맞는 지질조사를 독자 수행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체코전력공사는 한수원과 손발을 맞춰온 국내 기업들의 원전 부지 조사 실적을 검토한 끝에 벽산을 낙점했다.

벽산은 국내 원전 지반조사 분야의 대표 주자다. 국내 사업에서는 통상 시추부터 데이터 분석, 컨설팅까지 턴키로 도맡아왔다. 이번 두코바니에서도 직접 시추를 맡길 원했지만, 현지 장비 반입과 시추 인력의 자격증 문제 등 체코 법률상 제약이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 체코 정부의 현지화율 요구까지 겹치면서 기술자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요한 지반사업본부장은 "수익은 절반가량 줄었지만, 향후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엔지니어링 기술자문 수요가 커질 것으로 보고 해외 트랙레코드를 쌓는 기회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체즈EP는 일반 인프라 기준으로 진행한 예비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원자로 주기기와 보조기기 등의 배치 계획을 짜둔 상태였다. 벽산이 참여한 본조사(부지세부조사)는 암반의 지지력과 변형 특성 등 설계 기준값을 산출해, 앞서 세운 배치 계획대로 실제 원전을 지을 수 있는지 검증하고 설계에 반영하는 핵심 단계다. 벽산은 체즈EP가 지하 100m 심도 시추를 진행할 수 있도록 장비 사양과 시추 기술 기준을 세워줬다. 시추 품질관리 절차서 작성과 현장 관리, 지반 분석 데이터 해석은 물론 국가원자력안전청(SUJB) 제출용 최종 보고서 작성까지 전 과정을 자문했다.

SUJB는 국내 원자력안전기술원(KINS)에 해당하는 규제기관이다. 예비조사와 달리 본조사 보고서는 SUJB의 심사를 거쳐야 건설과 운전 허가가 나오기 때문에 모든 데이터의 빈틈없는 검증이 필수적이었다. 벽산은 40여 년간 쌓아온 규제 대응 노하우를 바탕으로 규제기관의 지적을 선제 방어하는 현장 기술지도를 펼쳤다. 원전 부지조사를 사실상 처음 해본 체즈EP로서는 현장을 이끌며 적기에 고품질 보고서를 완성해 준 벽산팀과 다시 손잡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K원전 생태계 독자 수출 길도 열렸다

이 같은 성과의 중심에는 현장팀을 이끈 박인식 벽산 전문위원(전무급)이 있다. 그는 한국 원전 지질조사 1세대다. 박 전문위원은 "국내 첫 원전인 고리 1~4호기와 월성 1호기를 지을 때만 해도 미국 웨스팅하우스나 캐나다 원자력공사 같은 외국 건설사가 지반조사까지 도맡아 진행했다"며 "우리 손으로 처음 지반조사에 도전한 것은 1979년 말 월성 2~4호기 사업부터였다"고 말했다.
'한국 원전 지반조사 1세대'인 박인식 벽산엔지니어링 전문위원(전무급·제일 왼쪽)이 체코 테멜린에서 영국 롤스로이스의 소형모듈원자로(SMR) 부지 지반조사를 자문하고 있다.  /사진=벽산
'한국 원전 지반조사 1세대'인 박인식 벽산엔지니어링 전문위원(전무급·제일 왼쪽)이 체코 테멜린에서 영국 롤스로이스의 소형모듈원자로(SMR) 부지 지반조사를 자문하고 있다. /사진=벽산
하지만 당시 국내에는 원전 지반조사를 감당할 민간 전문 기업이 아예 없었다. 결국 당시 한국전력공사의 요청으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구원들이 현장에 차출돼 투입됐는데, 박 전문위원도 그 중 한명이었다. 박 전문위원은 "개개인의 연구 역량은 뛰어났지만, 실제 원전 현장을 겪어본 적이 없다 보니 한계가 뚜렷했다"고 했다.

결국 연구원들은 캐나다 원자력공사 계열사인 카나톰(Canatom) 등 해외 전문 기업을 불러들여 기술자문을 받아가며 현장에서 일을 하나씩 배워야 했다. 이 같은 해외 기업의 기술 전수는 1987년까지 계속됐다. 박 전문위원은 "40여년 전 외국 기술진에게 어깨너머로 배웠던 한국 1세대가 이제는 거꾸로 유럽 현지 엔지니어들을 직접 지도하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박 전문위원이 합류한 벽산은 1984년 영광 원자력 후속기 세부지질조사를 시작으로 2012년 신한울 3·4호기까지 국내에서 총 23건의 원전 관련 지반조사를 수주해왔다. 신한울 3·4호기 전까지는 2~3년마다 새 사업을 따내며 실적을 이어왔으나, 이후 신규 원전 발주가 끊기며 긴 공백기를 겪었다. 탈원전과 원전 생태계 복원이라는 격동기를 거친 끝에 체코 두코바니에서 기회를 잡았고, 이를 발판으로 자체 실력을 입증하며 테린 수주까지 이뤄냈다.

이번 수주는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가 열린 상황에서 국내 원전 생태계의 중소·중견기업에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팀코리아라는 큰 우산을 넘어 자체 역량으로 글로벌 시장에 독립적인 기술 수출을 달성했다는 점에서다. 박 전문위원은 "앞으로 전 세계에서 원전 건설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벽산이 독자적인 해외 실적을 확보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이를 토대로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직접 독자 수주 영업을 펼쳐보겠다"고 말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국내 원전 생태계 세일즈맨을 자처해 왔다. 미국과의 대미투자 프로젝트 협상 과정에서도 미 현지 원전 건설 사업에 팀코리아가 참여하는 방안을 먼저 제안했을 정도다. 그는 "원전 수출은 기술과 가격만으로 되지 않으며, 산업협력은 물론 규제협력까지 총동원해야 하는 국가 대항전"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벽산의 기술자문은 까다로운 해외 규제기관의 인허가 벽을 넘어서게 한 대표적인 민간 협력 사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