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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신길동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직장인 원모씨(32)는 불안해했다. 분양가의 10%인 계약금(1억8500만원)은 현금과 주식을 팔아 마련했다. 중도금 일부는 집단대출을 받아 해결하기로 했다. 4년 뒤 입주할 땐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잔금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집 마련의 공식이었다.
하지만 대출 규제가 등장했다. 생각지도 않은 변수였다. 주택대출 한도가 갑자기 50% 줄어든 4억원(수도권·규제지역의 15억원 초과~25억원 이하 주택)이 됐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해 맞벌이로 지금까지 모은 돈은 5억원가량. 원씨 부부는 전세보증금을 줄이고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당연히 계획한 출산은 미뤘다. 아내가 일을 쉬면 소득이 감소한다. 그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대출 정책을 생각하면 2030년 입주할 때 같은 한도가 적용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더 불안하다”고 했다.
결혼·출산·노후 흔드는 주거정책
한국에서 안정적인 인생 계획을 흔드는 건 압도적으로 주거 환경이다. 단순히 집값이 비싸다는 문제가 아니다. 주거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녀 교육, 노후 등 중요한 계획은 수립조차 못한다.한국경제신문이 연령대별로 심층 인터뷰한 결과, 이런 불확실성은 특정 세대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었다. 동작구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 임경빈 씨(25)는 올 들어 거주지를 몇 달마다 옮기고 있다. 자취방에서 취업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최근 전셋값 급등의 여파로 월세가 50만원대에서 70만원대로 올랐기 때문이다. 임씨는 “인턴 기간에는 고시원에서 지내고, 인턴이 끝나면 고향 부모님 댁으로 내려갈 생각”이라며 “언제 취업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거까지 문제를 일으키니 불행해졌다”고 말했다.
결혼과 출산을 앞둔 30대의 시간표도 바뀌고 있다. 마포구에 사는 윤모씨(31)는 올해 말께 전세를 갱신하려고 했지만, 비거주 1주택자에 대한 세금 부담을 강화하는 ‘8·3 세제 개편안’이 발표된 직후 집주인이 갑자기 들어오겠다고 통보했다. 윤씨는 “전세 물건도 씨가 말라 울며 겨자 먹기로 급히 매매를 알아보고 있다”며 “계획에 없던 급전이 필요하다 보니 출산은 뒷전이 됐다”고 토로했다. 영등포구에 사는 주모씨(30)도 “내 집 마련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 계획인데, 2~3년 뒤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결혼은 포기한 상태”라고 했다.
노후 계획이 흔들리는 사례도 많다. 10여 년 전 아내와 모은 자금을 쏟아부어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한 임모씨(55)는 직장과 가까운 마포구에서 전세로 살고 있다. 강남 아파트는 은퇴 후 노후 자금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장기보유특별공제 기준을 ‘보유’에서 ‘실거주’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바꾸는 세제 개편안을 내놓으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정부를 믿고 장기간 인생 계획을 세운 직장인으로서 은퇴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노후 계획을 백지화해야 하게 생겼다.
급한 정책이 신뢰도 하락시켜
다른 정책도 예측 불가한 삶을 만들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김모씨(44)는 입시가 최대 고민이다. ‘2028~2037년 국가교육발전계획’에서 서술·논술형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고교 내신 절대평가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사교육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대치동 학원가는 설명회를 열 때마다 김씨처럼 불안해하는 학부모로 가득 찬다.그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논술학원에선 여름방학 때부터 특강을 시작했다”며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일단 수업을 등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입시 제도가 수시로 바뀌니 모든 걸 준비해야 해 학원만 돈을 벌고 자녀를 둔 학부모는 피곤해진다”고 덧붙였다.
국민연금 제도도 마찬가지다. 연금개혁 논의가 지속되면서 수급 개시 연령이 20~30년 남은 젊은 층일수록 기성세대보다 ‘더 내고, 덜 받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크다. 40대 초반인 이모씨는 “최근엔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8세로 높이자는 얘기까지 나오니 소득 공백 기간을 어떻게 계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연령대별로 고민의 대상은 다르지만 밑바닥에 깔린 질문은 비슷하다. 지금 이 정책이 몇 년 뒤에도 지속될지, 지금 세운 인생 계획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을지 사회에 묻고 있는 것이다.
국회미래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낸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불가피한 사회 변화가 아니라 정권의 지향에 따라 정책이 반복적으로 바뀌면 국민은 ‘이 제도를 믿어도 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고, 사회적 신뢰도 훼손된다”며 “국민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선아/안정훈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