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투자자 유모씨는 지난 3월 증권사 랩어카운트에 1억원을 맡겼다. 수년간 직접 주식에 투자했지만 극심한 변동성 장세에 지쳐 전문가에게 자금 운용을 맡기기로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올해 누적 수익률은 41%. 6~7월 급락장과 8~9월 박스권 장세를 거치고도 코스피지수 상승률(7%)의 5.9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증권사가 고객 자금을 일임받아 주식, 채권, 펀드 등에 투자하는 랩어카운트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증시 호황으로 투자 인구는 늘었지만 쏟아지는 투자 정보와 극심한 변동성에 지친 개인투자자가 전문가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높은 수수료에도 변동성 장세에 인기
9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일임형 랩어카운트 고객은 201만2196명으로 집계됐다. 6월 처음 200만 명을 돌파한 뒤 3개월 연속 200만 명대를 유지했다. 2021년 2월부터 4년 넘게 180만 명대에 머물던 고객 수는 코스피지수가 4000을 넘어선 지난해 10월부터 가파르게 늘기 시작했다. 작년 9월과 비교하면 11% 증가했다.
자산 증가 속도는 더 빠르다. 8월 말 기준 랩어카운트 계약자산은 123조4838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9월 약 91조원에서 11개월 만에 35% 급증했다.
랩어카운트가 국내에서 처음 인기를 끈 것은 2010년대 초반이다. 당시 자동차, 화학, 정유 등 이른바 ‘차화정’ 우량주에 집중 투자하는 자문형 랩이 높은 수익률을 내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2011년 유럽 재정위기로 증시가 흔들리자 인기가 식었다. 이후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와 채권형 랩·신탁의 불건전 운용 논란 등을 거치며 시장은 장기간 침체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지난해 증시가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면서다. 주가 상승으로 투자 수요가 커진 데다 투자 상품이 다양해져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려는 투자자가 늘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지수는 오르는데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초보 투자자부터 수익률을 극대화하려는 고액 자산가까지 랩어카운트를 찾고 있다”며 “투자 상품이 다양해진 것도 전문가에게 자금을 맡기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높은 수수료도 인기를 막지 못하고 있다. 랩어카운트는 기본 일임수수료 외에 수익의 최대 20%대에 달하는 성과보수가 붙기도 한다.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 비용 부담이 크지만, 변동성 장세에서 손실을 경험한 투자자 사이에선 수수료를 내더라도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15년 만에 부활한 자문형 랩
2010년대 초반 랩어카운트 열풍을 이끈 자문형 랩은 15년 만에 다시 주력 상품으로 떠올랐다. 자문형 랩은 외부 투자자문사나 자산운용사가 투자 종목과 비중 등을 제안하는 상품이다. 올해 8월 기준 자문형 랩 계약자산은 10조6591억원으로 작년 9월보다 220% 급증했다.
증권사가 자산운용사와 손잡고 ‘목표전환형 랩’ 판매를 확대한 영향이 크다. 목표전환형 랩은 일정한 목표 수익률에 도달하면 채권 등 안전자산으로 자동 전환하는 상품이다. 상승장에서 수익을 추구하면서도 목표 수익을 달성한 뒤에는 시장 변동에 따른 손실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코스피지수가 6000대에서 횡보한 8월에도 주요 증권사의 랩어카운트 자산은 빠르게 늘었다. 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신한투자증권, KB증권 등 5개 증권사의 랩어카운트 자산은 83조7675억원으로 1년 전보다 71% 급증했다.